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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19 17:03
[시애틀 문학-공순해 수필가] 춘향을 탐하다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529  

공순해 수필가
 

춘향을 탐하다

 
벨뷰 정 선생이 쑥을 가져왔다. 쑥을 담은 봉지에는 그뿐이 아니었다. 머위잎, 참나물까지 봄이 참다랗게(?) 들어 있었다. 봉지를 여는 순간 봄 냄새가 쑤욱 올라와 실내에 퍼졌다. 지난 겨울 동안 지표를 뚫으려 힘깨나 썼을 놈들. 드디어 지구를 열어 젖히고 예까지 당도했구나!

정 선생이 돌아가고, 우선 쑥을 씻어 찹쌀 가루에 묻혔다. 그리고 밀가루를 더해 전병을 부쳤다. 입안 가득 고이는 봄. 봄을 씹으며 며느리를 불렀다. 역시 그 애도 봄이라며 좋아했다. 하지만 아들은 시큰둥했다. 이게 진정한 한국의 냄새야. 코리안 허브! 내 말에 동의는 하면서도 그 애는 정서적으로 와 닿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며느리가 더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강남 아파트촌 태생이 쑥을 어찌 아느냐니까, 저희 때만 해도 봄이면 봄나물 캐러 다녔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하기 좋은 봄놀이였다고.

그때만 해도 자연이 살아 있었구나.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겐 책으로, 상상으로 떠올려 보는 자연일 뿐이겠지? 야외에 나가 자연 체험을 해본다 해도 기획되고 디자인된 자연일 테고. 며느리와 주섬주섬 대화를 나누며 문득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쑥 향을 모르는 건 그 애 탓이 아니다. 그 애가 고교를 마칠 때까지 산 곳에선 한국 식품 조달이 자유롭지 못했었다. 봄이면 쑥을, 냉이를, 두릅을 그리워했고, 여름이면 호박 잎을 머릿속에서만 상상해보며 해를 보냈다. 하니까 아들이 쑥 맛을 쑥으로 알게 된 건 당연하다

그러지 않아도 그래서 그때 그 애에게 무척 미안했고, 염려스럽기도 했었다. 한국의 자연을 맘껏 호흡했던 부모와 달리, 대도시 뉴욕의 회색 콘크리트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의 정서가 회색이 될까 봐. 그리고 그게 이제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그러자 문득 오래 전 ESL 클래스메이트 타티아나가 떠올랐다. 스피치 연습 클래스에서 큰 건물에 들어가 봤을 때의 느낌을 마지막 과제로 받았을 때, 그녀는 끝까지 발표를 못했다. 그때 아마 나는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JFK 공항에 도착한 느낌을 발표했을 게다

러시안을 사용하는 그녀는 그러나 우크라이나 출신이어서 세상 견문이 적고, 아는 바가 없어 적당한 제재를 찾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기말시험인데 발표를 안하는 그녀로 해서 모두 조바심이 났다.

마지막 수업 시간, 18명 학생의 발표가 다 끝나고, 딱 한 사람, 그녀만 남았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순간 우뚝 일어섰다. 그리고 마른 침을 삼키며 앞으로 나갔다. 학생 전원이 자신들이 방문했던 정부 청사나 대저택, 대성당, 교회, 박물관 등에 대해서 발표를 했었기에 모두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정확한 발음을 하려 노력하며, 한 대저택에 대해 묘사를 시작했다.
흰색의 대저택 안은 흰색의 레이스 커튼과 인상파의 그림으로 꾸며져 있고, 넓은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 마당 뒤쪽엔 포도 농원이 있어, 포도가 익어 가는 가을이면 감사 기도를 올리고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는, 그 대저택은 앞으로 그녀가 살게 될 꿈속의 저택 설계도였다. 긴장했던 교실엔 그녀의 스피치가 끝나자 놀람과 감동의 박수가 쏟아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곤경을 상상력으로 돌파한 그녀에 대해 교수는 흥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타티아나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고국에 두고 온 딸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한껏 상상하며, 그리워하는 가난한50대 이민자의 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그 교실 인원 19명 중 한국인은 나 혼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러시안 쥬이시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타티아나로 해서 체험해 보지 못했으면 상상으로라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상력이란 사물과 사람의 인식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라고 프랑스의 어느 석학은 이미 갈파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들이 쑥을, 한국의 봄을 상상으로라도 알기 원해, 한국의 봄에 대해 몇 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감흥을 보이지 않는 그 애 표정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요즘엔 자연을 자연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연이란 이미 인공 자연이 되고 말았으니까. 시애틀의 봄을 대표하는 스캐짓 밸리의 광활한 튤립밭도 재배된 자연이지 야생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엔 자연 대신 생태라고 부른다. 심지어 생태 관광이란 말도 생겨났다.

실상 말하자면 나 자신도 생태에 대해선 어둡다. 어린 시절 쏘다니던 산과 들판으로부터 떨어져 온지 무릇 얼마이던고. 그저 그곳을 그리워만 할 뿐, 이곳에선 어쩌는 도리가 없다. 그랬기에 늘 한국의 봄을 상상으로만 즐겨왔다.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상상은 참을 수 있으나, 눈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상은 참으로 사람을 감질나게 한다. 그래서 봄이면 늘 안타까웠다

한데 오늘 느닷없이 상상의 봄이 아닌 실제의 봄에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이 귀한 한국의 봄 내음을 그냥 보내긴 아쉬웠다. 그래서 입 속에 퍼지는 춘향(春香)을 꿀꺽 삼키기 아까워 입안으로 이리저리 살살 굴려 보았다. 변 사또 춘향이 어르듯? 하하! 그랬다간 이몽룡에게 깨지지. 그냥 잠깐만 어르어 보자고. 달빛 창가에 비친 나뭇가지 그림자가 나를 찾아온 임인 줄로 착각하다 순간 깨어날 그 짧은 찰나만이라도. ! 이 정도면 내 탐심(貪心)도 꽤 깊은 게 아닌가.

봄이 깊어 가고 있다. 봄마다 봄마당에서 봄을 캐 올리는 정 선생에게 진정 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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