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안개
속에서
오늘도
안개가 짙다. 좀 더 일찍 출근길을 나선다. 앞차와의 거리를
많이 두려고 하고, 바짝 따라오는 차가 있으면 옆 차선으로 비켜준다.
출퇴근 길이 80마일이니 하루에 130㎞씩 운전하는
셈이다.
가시거리가 짧을수록 주변의 사물을 잘 볼 수 없기에 불안하다.
장거리 운전을 하는 사람들에게 안개는 시야를 가리는 지극히 위험한 장애물이다. 오로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짙은 안개가 낀 날이 많았다. 많은 기대 속에 출발한 새 직장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이것에 박차를 가하듯 출근길마다 가득 낀 안개는 나를 더욱 절망하게 하였다.
고속도로에서 몇 중 추돌사고가 났다는 뉴스는 불안함을 더욱 부추겼다. 안개는 불을 지피기
위해 쑤셔 넣은 불쏘시개가 내 가슴 속에서 열정의 불은 지피지도 못하고 요란하게 피워내는 연기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
직장이 있었던 모현(慕賢)으로 가는 길도 늘 안개가 짙었다. 경안천을 따라 피어난 안개는 몇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짙었다. 출근하기 위해 시골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몇 분 동안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 짧은 시간에도 머리카락에 금세 물방울이 맺히곤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 안개 속에 나의 미래까지 갇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갑갑해지곤 했다. 그래도 기다리던 버스는 꼬박꼬박 왔다. 그리고 나는 첫 직장을 미련없이
떠나 더 큰 도시로 갔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기 전까지는 나는 안개 낀 아침을 늘 불안해 하거나 싫어하지 만은 않았다. 오히려 안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도 많다. 안개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특히
산허리를 감은 안개 속에 선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사랑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듯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아침 안개가 남기고 간 이슬방울이 나뭇잎이나 꽃잎에 맺혀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겁다. 아침 호수가 품은 안개는 또 어떤가? 호수의 아침 안개는 피어나는
모양이 새색시의 수줍음을 닮았다.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순백색 우유처럼 부드럽다. 부드러운 솜사탕인 양 손가락으로 집어 내어 입안에 넣어 보고 싶어진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날의 안개는 아름답고 평화롭다.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속리산에 간 적이 있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지만, 산이
겹겹이 펼쳐진 그 날 아침 풍경은 무색으로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무색으로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 생각해 보니 그것은 높은 산 때문이 아니라 골짜기가 품은 안개 때문이었다.
높은 곳에서 한 구비 한 구비 돌아 산을 내려오면서 만나던 풍경이 어린 눈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수학여행에서 다른 기억은 가물가물해도 안개에 대한 기억은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있다.
안개는
왜 우리의 주변을 덮는가?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안개는 지표면과 대기의 온도 차에 의해서 생긴다. 따뜻한 대기와 차가운 지표면의 갈등의 상황이 안개를 만든다. 마음에
피는 안개도 그럴 것이다. 현재 처한 상황은 일이 잘 안 풀리고 갑갑하다. 몇 년 후, 아니 몇 달 후의 미래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개가 낀 날은 날이 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시적으로 우리의 시야가 흐려지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안개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곧 좋은 날이 온다는 신호가 아닐까?
모현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갑갑해 하던 안개의 시간도, 생각해 보면 가을 벼가 익어가고 강에는 물고기 떼가
살찌는 계절이었다.
직장에서
내 자리에 앉으면 아주 멋진 레이니어 산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한 지 반 년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블라인드를 걷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너무나 뜻밖에 레이니어 산을 발견하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안개 속을 달리는 차에서 마냥
불안해하며 창 밖의 풍경을 생각하지 못한 날들처럼 레이니어 산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매일
창 밖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다시 발견한 사실은 레이니어 산이 잘 보이는 날보다 보이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레이니어 산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안개는 징조다. 그 너머에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고, 맑은 날이 온다는 신호이다. 안개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조심조심
사리분별을 하도록 벼르는 시간이다.
이제 안개가 낀 아침에도 조급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다만 조심조심 최선을 다해 길을 가야겠다. 안개 저 너머에 태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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