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에 시애틀 공연 다시 하고파”
-'살아있는 전설’ 선생과 마운틴 레이니어를 가다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배뱅이가 평생 나를 먹여 살렸지요.”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 이은관 하면 배뱅이굿’ 이라는 등식은 세상이 하루가 무섭게 변해도 여전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나이인100살인 ‘상수(上壽)’를 코 앞에 둔 고령이지만 그가 토해내는 소리는 천길 벼랑을 쏟아 내리는 폭포수처럼 생동감 넘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인 서도소리 ‘배뱅이굿’은 무당이 하는 ‘굿’이 아니다.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의 이야기를
서도소리로 풀어내는 1인 창작극이다.
최
정승의 딸 배뱅이가 상사병을 앓다 세상을 떠나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 하기 위해 전국 팔도의 이름난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때 지나가던 건달 청년이 거짓 무당 행세로 횡재를 한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부터
구전돼 오다 평양 출신 서도 명창 김관준이 1910년을 전후해 개작한 것을 이인수 명창에게 전수됐고, 이은관에게로 이어졌다. 한국 나이로 97세, 만 96세인 이은관 선생은 그 배뱅이를 80년 동안이나 읊어댔다. 배뱅이굿에 관한 한 그를 따를 자가 없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 자체다.
소리와
몸동작으로 때로는 웃음과 슬픔, 깊은 곳에서 묻어 나오는 회한을 꺼내 달래고 어루만진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었고
이마에 주름은 파였어도 족히 20년은 젊어 보이는 이은관 선생은
아직도 국악이야기가 나오면 ‘물 만난 고기’처럼 입을 닫을 줄 모른다.
지난 7일 생애 처음으로
타코마 판타지극장에서 펼쳐졌던 시애틀 공연을 마친 이은관 선생과 다음날 마운틴 레이니어 관광을 함께하며 1세기를 살아온 그로부터 삶과 소리, 국악,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무엇보다 장수 비결이 무엇입니까.
“특별한
비결이랄 것도 없어요.
사람의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욕심 안 부리고 살면 그게 행복이고, 행복해야 장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내 나이에 이렇게 무대에 설수 있다는
것도 나에게는 큰 축복이지요. 공연도 매주 한 번씩은 하고 있어요. 또 음식은 소식을 하지만 하루에4~5끼씩 먹어요.특히
면류는 종류를 안 가리고 다 좋아해요. 졸리면 자고 눈뜨면 악기(색소폰, 키보드, 아코디언)도 연주하고, 작곡과 작사를 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불행이고 빨리
늙어 죽는 원인이지요.”
-시애틀에서 처음 공연을 했는데 소감을 부탁하자면…
“수도
없는 많은 해외공연을 했지만 이번 시애틀 공연은 나에게 특별한 보람도 있었고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지요. 미국 공연도 LA를 비롯해 뉴욕 등에서 했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극장에서 훌륭한 음향과 조명으로 우리 출연진 모두가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연이었기에 기억에 더 남을 거 같아요. 시애틀 동포들이 이렇게 국악에 관심이 많은 줄 정말로
몰랐어요. 특히 미국에서는 여자들도 대부분 일을 한다는데 이렇게 시간을 내서 틈틈이 국악을 배워
함께 공연을 펼칠 수 있는 실력을 보고 그들의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자인 권다향 명창은 어떻게 아시는지요.
“권다향과는
40여년 인연이 있어요. 내가 아끼는 제자 가운데 손가락에 꼽는 유능한 국악인이었지만
아쉽게 미국 이민으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됐어요, 그래도 자주 전화를 해서 안부도 물어보고 딸 같이 생각을
하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공연도 수 없이 다녔고 특히 월남(베트남)공연을 함께 갔는데 그때 폭탄이 날아와 일행이 모두 황천길로 떠날 수도 있었지만 운이
좋아 이렇게 살아남았지요. ‘다향’이란 이름은 사실 예명으로
내가 지어준 이름이지요. 20을 갓 넘은 나이에도 국악에 소질이 워낙 뛰어나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서
응용하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처녀였어요. 특히 장고치는 솜씨는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국악에서 흔히 하는 ‘1.고수(鼓手)
2.명창’이란 말이 있어요. 이 말의 뜻은 장고를 치는 사람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한 번은 공연을 해야 하는데 장고를 치는 사람이 오지를 않아 난감했어요. 그 당시에는 전화도 귀했던 시절이라 연락을 할 방법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권다향에게 장고를 치게 해 공연을 무사히 끝냈지요. 그런데 장고를 그렇게 잘 치는지… 여러 가지 국악의 향기가 난다 하여 내가 그때부터
아예 이름을 다향이라고 불렀고 자연스럽게 본명은 없어지고 예명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왜 국악인의 길을 택하셨는지요.
“지금
젊은 사람들이야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유성기’라고 레코드판을 올려놓으면 나팔처럼 생긴 곳으로 음악이 흘러 나왔지요. 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어른들이 모여 당시 유명 만담가인 신불출 선생의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아버님을 쫓아 뒷산에 나무하러 갈 때면 산타령을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나도 따라 부르게 되었고, 소학교(초등학교)시절에는 학예회에서 동요를 불러 우등상도 받았지요. 17살 때는 철원극장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창부타령’을 불러 1등 했어요. 본격적으로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갔지요. 방송국에도 출연도 하고 조선가무단에 들어가 유랑극단 생활도 하다 1957년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어요. 흔히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과거를 후회하지만 나는 결코 국악인이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선생의 신민요 보급과 양악기 연주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국악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가사만 있지 악보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악보가 있어 음의 높낮이를 구분해야 제대로 된
음을 구사할 줄 알게 됩니다. 또한 일반인도 쉽게 배우고 따라 불러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악기 연주도 관객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공연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무형문화재 심사위원들이 ‘우리 전통 가락에 양악기 연주는 품위가 없다’고 반대를 했지만 1984년에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지 않습니까?”
-이번 공연의 출연료를 국악한마당에 기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권다향이
내 제자지만 스승의 입장에서 얼마나 대견스럽고 자랑할 만합니까? 미국에서 우리의 전통국악 보급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시애틀에 있으면서 국악한마당 회원들이 우리 일행에게 베푼 환대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감사를 합니다. 도착 하는 날,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만들어준 저녁이 감동으로 다가왔고, 시애틀 부근에서 제일이라는 이곳(마운틴 레이니어)까지
구경시켜 주는데 무슨 사례비입니까? 미국 공연을 수 차례 다녔지만 입장료가 1인당 20달러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권다향이 최소한의 경비만 보충하자는 생각으로 추진한 공연이고, 한인들을 위해 마련한 공연이라는
생각에 나도 협조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꿈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엇인지요.
“4년만 있으면 100살입니다. 인생을 잘 마무리해야 되겠지요. 그 동안 후계자 선정 문제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번에 같이 동행한 (김)경배가 올 3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정말 다행입니다. 나를 불러 준다면 더 힘이 빠지기 전에 열심히 다니려고 합니다. 100살에 시애틀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건강에 유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행복하세요”
시애틀N=김성배 편집위원 sbkim@seattlen.com
<이은관 선생 프로필>
1917.
11.27 강원도 이천 출생
1936
서도소리 및 배뱅이굿 사사(이인수
명창)
1940
경기민요 및 시조 사사(최경식 명창)
1943
만담가 신불출 일행 입단
1957
양주남 감독의 영화 ‘배뱅이굿’ 출연
1970
이은관 민속예술학원 설립
1984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지정
1990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1999
민요 140여곡을 악보로
정리한 ‘가창축보’ 발간
2002
제9회 방일영국악상 수상
[이 게시물은 시애틀N님에 의해 2013-09-22 08:30:20 헤드라인 뉴스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