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목사
유진 중앙교회 담임(오리건주 유진/스프링필드 소재)
92센트…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헌금
그 날 새벽도 예외 없이 차가운 공기가 전신을 감돌았다.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는 길을 지나 교회당 문으로 다가가면서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검은 물체가 눈에 띄었다.무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도시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 그늘에 가리워진 구석 구석에는 홈리스들의
애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조국에서도 걸인들을 심심찮게 보았지만 여기 미국 땅에서처럼 떼를 지어
모여있는 모습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시내를 운전하다 보면 사거리 한 모퉁이에서“Anything can help!”“God bless you!” 등글을 적은 팻말을 들고 서서 지나가는 운전자들과 눈을 맞추려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무숙자들이
낯설지 않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국정 연설이 생각났다.
전국에 생중계된 이 연설의 하이라이트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한 부분이다. 그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경제가 지난 세기 어느 때보다도 호전된 나라라고 강조하자
여 상하원의 모든 의원들이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화려한 옷 차림의 청중, 반짝이는 계급장과 훈장으로 어깨와 가슴을 온통 수놓은 듯한 제복을 입은 고위 군인들의 얼굴은 미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바로 내 발 앞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미국인이 누워 있다. 하루를 오갈 데 없어 헤매다가 교회의 출입구 앞에서 싸늘한 새벽 공기를 맨몸으로 맞으며 새우 잠을 자는 그의
모습은 여기가 미국 땅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했다.
미국이 풍요한 나라라는 말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가 내 발자국 소리에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지친 몸을 새우잠으로나마 풀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많은 건물들 중에서 교회당 추녀 밑을 찾아와 준 것이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교회당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누워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모습이었다. “Hello, how are you?” 나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친절하고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Hi...”그도 조용히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물었다. “What time?”
“Four Thirty(새벽 네 시 반입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매우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편한 마음으로 쉬라는 시늉을 하고 따끈한 커피 한잔을
건넸다.
새벽기도회가 끝난 후 교회당을 나설 때는 문 앞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반짝이는 동전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교회당에 들어 올 때는 없었던 동전들이었다. 25센트짜리 세 개, 10센트짜리 한 개, 5센트짜리 한 개, 그리고 방금 은행금고에서 나온 듯 반짝이는 금동빛의
1센트짜리 두 개로 1 달러에서 8센트가 모자라는 액수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그 청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누웠던 자리는 젖은 옷에서 묻어 나온 물기로 희미한 얼룩만 남아 있었다. 내 손 안에 든 92센트의
무게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그 홈리스에게 이 돈은 전 재산이었을는지 모른다. 눈 바람 맞으며 사거리에 서서 애타게 구걸하여 얻은 돈일
수도 있고, 따끈한 커피 한잔이라도 마시고 싶어 아껴 두었던 동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전부를 털어서 교회당 문 앞에 고스란히 내어 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날 새벽, 나는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추운 정월 중순에 교회당을 찾아와 문 밖에서 새우 잠을 자고 있던 그 홈리스 백인청년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이
동전들은 그에게 든든한 위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머니의
모든 동전을 털어서 동양인의 교회당 문 앞 바닥에 내놓고 훌훌히 사라진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동전들을 오는 주일예배 헌금 시간에 홈리스 몫으로 헌금 함에 넣으리라. 그리고
그를 기억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리라.
미국의 위대한 힘은 홈리스가 없는 나라, 군사
대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찬바람 속에서 생명을 버텨나가는 무명의 홈리스의 마음 속에까지 심어 주신 따뜻한 감사의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