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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10 19:04
[신앙과 생활] 정의와 사랑이 상충될 때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4,233  

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정의와 사랑이 상충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작게는 가정으로부터 크게는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완전 무결할 만큼 선하고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의로운 주장, 의로운 비판, 의로운 채찍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가 하면 사랑의 이해와 사랑의 용서와 사랑의 치유도 따르게 됩니다.

이 정의와 사랑이 가장 원만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 가정입니다. 특히 우리 동양사회는 엄부자모(嚴父慈母)의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면서, 대체로 아버지는 엄하게 정의의 매를 드는 분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채찍에서 오는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역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라고 하는 유대가 아닌 일반 사회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불의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고 그 불의를 규탄하는 정의의 채찍이 따르게 되는데, 그 정의의 채찍은 사회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에 필수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또 한 쪽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랑의 눈으로 봐줘라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는 사랑의 종교를 믿는 기독교인이야!” 이 소리에 정의를 부르짖던 많은 사람들이 멈칫거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눈으로만 보게 될 때 정의의 질서는 깨어지고 사회 정의는 무너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살리려니 사랑이 죽고, 사랑을 지키려니 정의가 사라지고 맙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예리한 정의로운 비판 앞에는 언제나 사랑의 결핍이라는 비난이 따라옵니다.

이런 경우에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를 주장할 때에는 그 어느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부르짖을 때에는 그 무엇인가를 보호하거나 이룩하려는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정의의 주장이 어느 도()를 넘게 되면 그 정의가 추구하는 바 표적을 잃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정을 위한다면서 내가 옳다는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그 가정을 파괴하게 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의의 주장을 끝없이 높여갈 때 교회 자체가 무너지게 되고,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하게 되면 나라 전체가 망국의 길로 가게 됩니다. 때문에 정의로운 주장은 필요하지만 그 주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의가 멈춰야 할 한계점은 어디이며 그 후에 오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해답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주어집니다. 한 아기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앞에서 솔로몬은 그 아기를 반으로 나누어 절반씩 가지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하지만 친 어머니는 그 아기가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그녀의 정당한 정의의 주장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아기는 사랑을 위해 정의를 포기한 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정의가 살았고, 그 아기의 죽음을 막음으로써 생명을 구하는 사랑도 살렸습니다.

내어줘야 내 것이 되는 법이 있고, 져주어야 이기는 법이 있고, 죽어야 사는 법이 있습니다. 사랑을 살리기 위해 정의를 포기할 때 정의도 살고 사랑도 사는 묘법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오묘한 영적 질서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가정ㆍ교회ㆍ국가ㆍ인간애 등 정의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모든 가치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받기 직전까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변호하였고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그 내용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으로까지 엮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억울하게 받은 사형판결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오히려 재판관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스스로를 변호하도록 유도하면서 기회를 드렸지만 끝내 함구하시고 일체의 변호도, 정당한 주장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어차피 무슨 일에서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과정에서 끝내야 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인간의 미진(未盡)한 부분을 완전무결하게 마무리하시는 절대자의 손길이 엄존하신다는 확고한 믿음만은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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