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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06 18:07
문갑연/어머니의 솥단지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210  

아들과 함께 알드우드 몰에 갔다. 횡단보도를 건너 입구로 걸어가는데 빨간산타 모자를 쓰고 종을 흔들며, “Merry Chrismas! Happy New Year!”라고 외치는 구세군을 만났다.

해마다 이맘 때면 으레 그 자리에 있었기에별 생각없이 옆을 지나치던 중이었다. 갑자기 자선냄비에 눈이 꽂히면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눈 앞에 걸려 있는 작은 냄비가 한아름도 더 되는 큰솥단지로 보인 때문이다. 그러면서 머릿속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해마다 구정이 되면 우리 집은 다른 집 보다 두 배는 더 바빠진다. 설날 아침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먼저 어른들께 세배하고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곧바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에 무척 분주해진다. 동네에 홀로 사시는 노인들이많고, 또 언덕 너머 움막을 짓고 살고 있는 나병환자 가족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이다.

설날의 즐거움도 잠시, 언니들과 함께 팔을 걷어 붙이고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했다. 안마당의 한 켠에는 큰 솥단지를 걸어 놓고, 장작으로 불을 지펴 고깃국을 끓이고, 그 옆에선 큰 언니가 쪼그리고 앉아돼지기름으로 반질반질하게 달군 솥뚜껑에 넙적한 적을 굽는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집안은 금세 잔치 마당이 된다. 한 쪽에 덕석을 펴고 상을 차리면이십 명이 넘는 이웃들이 모여든다.

솔가지에 불을 피우고 손을 쬐면서 오랜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들 즐거운 표정들이다. 언니와 나는차례상에 남겨 둔 여러가지 음식들을 상마다 부지런히 갖다 나른다.

그리고 그 분들이 가실 때에는 썰은 떡,부침개, 산적, 내가 좋아했던 찹쌀 유과까지 다 싸서 드린다. 그렇게 잔치를 치르고 사람들이 가고 나면 설날 끝인데도 우리들은 별로 먹을 게 없다.홀로 자식들을 키우느라 새 옷 한 벌 못 사입는 어머니께서 왜 그렇게 하실까, 한 번은 궁금해서 여쭤 보았다. 식구들 먹을 건 남겨 두셔야지,그렇게 다 싸 주면 어떡하냐고. 그때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받았던 만큼 나눠주는 거란다.”

어머니는 지난 일을 이야기 해주셨다.

6ㆍ25 사변 때, 대전에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어머니는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밤낮으로 걷고 또 걸어가던중 너무 지치고 배가 고파 무작정 찾아 들어간 곳이 할머니 한 분만 계시는 외딴 시골집이었단다.

그 분은 홀몸이 아닌 어머니를 보고서 깜짝 놀라며땅 속에 묻어 두었던 감자와 보리를 꺼내서 새 밥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단지를 앞에 갖다 놓고서 뱃 속의 아기 것까지 양껏먹으라며 등을 토닥여 주셨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 감자밥이 눈 앞에 있는데도 어머닌 눈물에 가려 그것들이 잘 보이지가 않더란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숨겨 두었던 비상 식량까지 꺼내 배고픈 임산부에게 기쁜 마음으로 대접했던 할머니의 고운 손길, 어머니께서는 따끈한밥보다 따스한 마음씀에 더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은 주위를 환하게 밝혀준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분의 따뜻한 이웃사랑이 어머니의 가슴에 강하게 전염되어 그때부터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느 틈에 내 안에도 물결치고 있다. 현실은 나를 가난 속으로 밀어넣었지만 내주위에는 나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파하는 이웃들이 있다. 이 추운 겨울을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게 보낼까, 마음이 저려온다.

있고 없음, 많고 적음이 아니라 조건 없이 받은 사랑 때문에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던 어머니의 솥단지 사랑. 한순간이나마 이웃사랑을못 본척하며 지나치려 했던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비록 작은 마음이라도 그들과 함께 한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따뜻한 겨울을 나지 않을까?호주머니에서 얼마 안되는 금액을 꺼내 자선냄비에 넣었다.

올핸 나도 무척 힘들게 보냈다.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밤에 잘 때만 30분 정도 히터를 돌린다. 어제 아침에는 아들이 서리가 하얗게 내린밖을 보더니, 엄마! 안 추워요? 물었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던 나는, 응! 엄만 괜찮은데. 라고 대답하고 보니까, 좀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아들도 이젠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됐다. 서로 환하게 웃으며 나는 일터로 향하고, 아들은 학교로 갔다.

요즘은 누구랄 것도 없이 안팎으로 무척 어렵고 힘든 때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먼저 웃고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그러다 보면 서로를 용서하고화합하는 사랑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을까? 밝은 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손이 되었으면 한다. 각 가정마다 사랑의 솥단지를 걸어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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