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에 대한 젠더 갈등이 작품 개봉 이후 점차 누그러져가는 분위기다. 개봉 전 포털 사이트 등에서 영화에 대한 평점 테러가 있었지만, 영화 개봉 이후에는 소설 출간 당시 보다 다듬어진 영화의 젠더 감수성에 대한 호평도 눈에 띈다. 또한 '82년생 김지영'을 다양한 영화 중 또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한 편의 작품으로 보는 시선도 생겨나면서 젠더 갈등을 유발하는 프레임도 이전보다 점차 흐릿해져가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주위를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배우들의 바람처럼, 혐오와 증오의 감정에서 벗어난 긍정적인 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영화는 지난 23일 개봉 이후 3일 만에 30만 관객을 돌파했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에서 정대현(공유 분)이 아내 김지영(정유미 분)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남편으로 그려지면서 포털사이트 기사 댓글창 혹은 영화 관련 게시판 등에 남성 관객들 상당수도 공감하는 의견을 게재했다. 극 중 정대현은 김지영의 육아, 재취업의 고민을 방관만 하지 않고 자신이 육아 휴직을 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남편으로 묘사됐다. 육아 휴직을 결심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는 대현의 모습에선 남성 관객들 다수도 남녀가 처한 사회구조적 문제에 함께 공감했다.
김도영 감독도 최근 진행된 '82년생 김지영' 관련 인터뷰에서 남성 캐릭터를 어떻게 영화에 담을지 고민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감독은 "(대현 혹은 남성 캐릭터가) 악하거나 나쁘거나 그런 느낌 보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관습이나 문화 그런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느낌을 책에서도 받았다"며 "(김지영이 겪는 일이 나쁜 인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변 풍경이 어떠한가 초점을 맞춰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버지, 남편 등 주변 분들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기 보다 서투르거나 모르거나 그간의 관습과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런 부분들을 그리는 게 좋지 않을까 했다"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요구받는 사회적 역할과 고정된 성 역할, 가사와 육아 노동 등을 견뎌내는 영화 속 김지영의 삶은 남성들의 삶이 여성들보다 결코 힘들지 않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김지영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 남성으로, 또 김지영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대현의 삶이 그려지고, 또 김지영의 엄마(김미경 분)의 삶도 따라가게 된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이라는 영화의 카피처럼, 김지영과 정대현, 그리고 주변인물들까지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온 모두의 삶을 조명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소설에 이어 영화까지, '82년생 김지영'은 시대의 젠더 이슈 흐름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고 화두를 환기시키는 역할로 기능하고 있다. 책에서 비롯된 반감을 어떻게 완화시킬지에 대한 영화의 고민은 담론의 고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텍스트로 소비됐던 소설보다 영상화된 영화는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 연기와 마주하게 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보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여성의 삶에 대한 영화의 계몽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아내와 남편, 엄마와 딸, 그리고 동료들과의 연대가 그렇게 관객들에게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82년생 김지영' 개봉 이후 호평에 대해 "지금 들려오는 말들이 감독으로서 제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다. '너무 위로가 됐다' '내 아내, 내 딸, 우리 엄마를 생각하게 됐다' 등 그런 말들이 너무 좋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봅시다'라는 것 보다는 여자든 남자든 눈 떠서 주변을 우리 엄마와 딸들도 이랬구나 보는 정도로 만족했으면 좋겠다"며 "저희 엄마도 제게는 처음부터 엄마였기 때문에 엄마가 누군가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저희 아이도 저를 엄마로만 생각한다. 엄마가 오롯이 혼자 있을 때의 삶을 모른다. 영화를 보시고 부모님들을 보면서 부모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고 주변 분들을 조금 더 다르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