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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7 23:19
안문자/조용히 다니는 가을빛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325  

안문자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조용히 다니는 가을빛

 
이곳엔 이미 가을잔치가 무르익었다. 시애틀에서 두 시간 남짓인데 이런 곳이 있다니. 풀스보(Poulsbo), 노르웨이 촌이란다. 거기서 더 들어간 시골, 샌디 훅 샥(Sandy Hook Shack)이란 생소한 이름의 아담한 집이 숨어 있었다.

가을 물이 듬뿍 들은 나무들 사이로 꼬불꼬불 들어서니 아름드리 나무들과 운치 있는 육각형의 정자 사이로 푸른 바다가 찰랑대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치며 호수 같은 물결을 배경삼고 살랑대는 들꽃과 빨갛게 익어가는 창가의 토마토 열매를 바라보았다. 긴 파마머리의 날씬한 여인과 인상 좋은 남편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맞는다

일 년 전에 예약해야 된다는 이 조그마한 산장은 1950년대에 지어진 아버지의 유산이란다. 남편은 컴퓨터에 붙어 앉아 싼값으로 할 수 있는 여행지를 찾다가 이곳을 발견했는데 누군가가 취소하는 바람에 우리가 횡재했다.

60여년의 세월이 말해주듯 보관된 물건들은 남루해 보이지만 정답다. 과거의 풍요를 말해주듯 벽에 걸린 전화기와 벽난로, 나무로 깎은 그릇과 유리 제품들이 옛 주인의 품위와 자연을 사랑했던 취향을 보여준다

물려받은 유산을 잘 가꾸어 귀하게 간수하며 여행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이들은 조상 덕분에 한 평생 먹고 사는 게 걱정이 없을 테니 누구나 이런 대물림은 부러워하겠다며 우리는 후후후, 웃었다.

이곳엔 TV가 없다. 인터넷도 연결이 안 된다. 안이나 밖이나 단순하고 고요할 뿐이다. 소박한 재료로 차린 음식도 소꿉놀이처럼 단순하다. 시간이 늘어난 듯 길다. 마음이 여유롭고 한가해져서 집 떠난 지 오래된 기분이다. 고즈넉한 분위기는 마치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여기만 숨을 쉬는 것 같다

할 일은 독서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 옛날에 읽었으나 새로운 느낌을 얻으려고 다시 읽는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다 간, 삶에 대한 진정한 자유인들이라는데…. 인간의 행복,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고 싶다

이성적인 작가 카잔차키스와 감정이 앞서는 괴짜 조르바와의 체험적인 이야기다. 책에는 로댕의 작품인 <하나님의 손> 이야기가 나온다. 손바닥 안에 여자와 남자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위엄과 경외심을 표현했을 게다. 조르바가 말했다. “사람들이 버둥거려 봐야 하나님의 손바닥 안이라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할까? 아니다, 하나님의 손바닥 안이야말로 안심하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인간의 무대다. 평화로운 하나님의 손은 무한대다. 온 세상이다. 우주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구나. 누군가 말했다. 자연은 하나님의 옷이라고. 특별한 감격이다.

석양에 붉게 타던 노을이 바다로 잠기면서 마지막 빛을 뿜어내던 해가 지평선 사이로 빠르게 숨는다. 찰라랑… 소리가 들릴 것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계속 책을 읽는다.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다와 나무가 그림처럼 은은한 회색 빛, 그 사이로 둥근 달이 두둥실 떠있다. 빙그레~ 웃는 보름달이 조금씩 하늘에서 움직이며 우리와 숨바꼭질한다.

시간은 소리 없이 쉬지 않고 흘러간다. 조르바는 현재의 순간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어제의 일은 어제로 끝, 지금 뿐이란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성경말씀과 같구나. 풀벌레소리가 들린다. 바람과 놀고 있는 나뭇잎 소리도 들린다.

찬란한 빛을 뿌리며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가을 햇살에 눈부신 바다는 다른 얼굴로 활기차게 반짝인다. 담 밑까지 가득 찼던 물이 철썩이며 서서히 제자리로 물러가고 말갛게 세수한 갯벌이 크게 숨을 쉰다.

끝이 없는 이 세상,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동서남북으로 조금만 나가면 이토록 예쁜 곳이 얼마나 많을까? 들고 온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 빨리 읽고 싶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곳엔 우리가 알 수 없는 문화와 예술, 서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색다른 자연의 변화가 숱하게 많을 텐데.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보이는 것도 다 바라보지 못하고 산다.

가을 아침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감사가 벅차 올랐다. 한껏 행복에 젖어 베란다에 놓여있는 둥근 식탁에 상보를 깐다. 들꽃을 꺾어 유리컵에 꽂는다. 부산을 떨다 보니 어느새 태양빛은 골고루 나뉘어 퍼졌다. 그러나 가을이 먼저 온 이곳은 아침 바람이 제법 차다. 가을빛과 바람에 겨울이 숨어있나 보다. 신비한 계절의 변화를 온 몸에 받으며 낙엽 닮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자연의 순리는 아무도 모르게 돌고 또 돈다. 예쁜 곳이나 미운 곳이나 살며시 와서 덤벙대는 삶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차분히 가라앉힌다. 노원호 시인의 시처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동안/ 가을빛은 제 몫을 다 한다/ -중략-/햇살은 가을을 위해 모두를 주면서도/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다닌다>
 
여행이란 쉼표라고 했던가. 일단, 멈춤도 되겠다. 무엇인가 끝내기 위해 숨이 찼던 나날, 의무감에 고단했던 육신, 참견하고 비판하던 정신에 쉼표를 찍자. 쉼이란 선물로 나를 쉬게 하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바다도 바라보자.

내 탓이요, 네 탓이요, 시끄럽던 마음도 정리해야지. 여행은 번잡한 삶의 상큼한 보상이다. 견디느라고 수고했다는 따뜻한 위로다. 우리는 이곳에서 조용히 다니는 가을 햇살의 영감을 가슴에 가득 채웠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면 무조건 용서하는 착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만 해야지.

아까운 이 곳, 떠나는 아쉬움 달래주려나? 조용히 다니던 가을빛이 웃으며 함께 가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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