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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1-02 02:24
[신년수필-이지은] 샬롯의 겨울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630   추천 : 0  

이지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샬롯의 겨울
 
가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거미줄이 작은 바람에도 일렁인다. 10월의 햇살에는 따사로움 속에 싸함이 묻어 있다. 창을 통해 내다보는 뒷마당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다. 익숙한 나무와 덤불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흔한 거미줄이 자리 잡고 있다. 어두운 숲속에서 만났다면 어딘지 으스스했을 거미줄이 눈부신 대낮에는 나무에 걸린 보석 같다

시선이 머무는 각도에 따라 반짝하고 윤기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 나무를 지지대 삼아 신비로운 도형처럼 촘촘히 짜여 있다. 그 거미줄 한가운데에 샬롯이 살고 있다.

샬롯은 내가 정서적으로 키우고 있는 애완 거미이다. 어느 봄날, 책상에 앉아 무심코 고개를 45도쯤 돌렸을 때 내 눈높이의 창밖에 샬롯이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미줄이 아른거리는 모양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자 가운데서 미동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거미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갈색 점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오렌지 빛에 검은색 물방울무늬가 있다. 몇 주를 아침저녁으로 거미의 존재를 확인하다 보니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졌다

문득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동화책을 떠올렸다. 원래 거미하면 좀 징그럽고 무서운 이미지가 컸다. 그런데 현명하고 따뜻함을 가진 책 속의 거미, 샬롯을 통해 더 친근해진 것이 생각났다.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번 쓰다듬어준 적도 없고 눈을 마주쳐 본 적도 없지만, 그날부터 샬롯은 일방적으로 나의 애완거미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창밖을 확인한다. 매일 아침 샬롯은 거미줄을 비워둔 채 산책을 떠난다. 쌀쌀한 새벽공기를 피해 나뭇잎 아래에 몸을 피해 있기도 하고 잔디밭 사이를 부지런히 걸어 다니기도 한다

그렇게 오전 동안 정원을 거닐다 햇살이 완벽하게 거미줄을 비추면 자신의 거미줄을 찾아 돌아온다. 그리고 오후 내내 샬롯은 명상을 한다. 능숙하게 거미줄 위에 균형을 잡고 앉아 눈을 감고 바람에 몸을 맡긴다. 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된 채 바람에 나부끼는 샬롯의 모습은 온전한 평화이다. 스쳐 가는 가을바람에 샬롯도 느꼈으리라. 이 따사로움 뒤에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사방이 어수룩해지면 그제야 작은 기지개를 켜고 명상에서 깨어난다. 저녁노을이 내려앉으면 샬롯은 집의 이곳저곳을 손보기 시작한다. 어디 찢어진 곳은 없는지 균형이 흐트러진 곳이 있는지 부지런히 오고 간다. 민첩한 행동의 샬롯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야행성인 거미는 저녁이 되면 완전히 깨어난다. 깜깜한 밤이 되면 더이상 샬롯을 관찰할 순 없지만, 아마도 내가 잠든 사이 뒷마당에선 바쁜 그들만의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비바람이 몹시 세게 불던 밤, 빗방울이 창문과 외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새벽에 잠이 깼다. 샬롯은 무사할까?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린 건 아닐까

다음 날 아침, 뒷마당 곳곳에 있던 모든 거미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웬만해선 잠을 깨지 않는 내가 일어날 정도였으니 가냘프고 연약한 거미줄이 그 비바람에 맞서진 못했을 것이다. 늘 하던 명상의 시간에도 샬롯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 준비를 하다 문득 떠올라 안방 창가로 달려가 보았다.

그곳에는 반가운 샬롯이 돌아와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분주하게 허공을 거미줄로 채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가을 폭풍이 지나갔을까? 샬롯은 언제나 그렇듯이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난 다음 날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삶의 일부라는 듯, 담담하게 새집 짓기에 몰두할 뿐이다. 늦가을까지 창을 사이에 두고 있던 샬롯이 밤 온도가 0도에 이르던 어느 날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거미줄도, 샬롯도, 샬롯의 친구들도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샬롯은 떨어진 나뭇가지의 틈이나 낙엽 더미 아래에 작은 공간에서 한껏 몸을 움츠리고 겨울나기 중일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이용해 최대한 낮고 조용히 기나긴 겨울과 맞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올 한해, 바이러스와 맞서고 이상 기후로 지구가 아파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소리 없이 흘렀다. 연말연시 떠들썩하게 사랑과 감사를 나누는 계절이 돌아왔지만 축하하기엔 아직은 이른 시간이다.

올해 겨울은 자연으로 돌아간 샬롯들처럼 우리 안에 집중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거센 폭풍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끊어지면 연결하고 부서지면 또 지으면 되니까. 그들의 담담한 끈기처럼 언제나 다시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새로 주어지는 시간들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향기로운 바람이 샬롯의 코끝을 간지럽히면 우리의 일상에도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다. 멀지 않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평범하지 않았던 2020년을 조용히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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