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목사(전 시애틀 한인장로교회 담임/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끝나지 않은 전쟁(암호쪽지 15-2)
15-2 암호쪽지
<나 그 구두 한 켤레 삽시다.>
이영철과
접선이 이루어진 것이다.
둘은 <동백야>를 나와 근처 다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영철이
긴장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게
우리 어머니 사진인데 보시면 잘 기억하실 것 같아서요.”
정보원이
핸드백에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이영철에게 보인다.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의 사진이다.
이영철은
앉은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고 정자세를 취한다.
접선의
둘째 관문도 통과한 것이다. 이영철에게서 신임을 받은 정보원은 이영철과 6월 25일 오후 3시에
서울 모처에서 만나면 북에서 온 특별한 밀명을 전달받게 된다고 일러준다.
만날
암호는 <서울에 언제 오셨나요?> <서울에
온지 삼 개월이 지났는데요.>
접선
완전 성공.
조
검사에게는 이제 완전하게 낚시 미끼를 삼켜버린 대어를 잡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영철과 접선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조 검사는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이영철 이 개자식 여기까지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조
검사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다.
<아직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다. 긴장하여야
한다.>
경란은
남장을 벗고 화려한 본래의 차림으로 <동백야> 단골손님이
된다. 거의 매일 저녁 <동백야>를 찾는다. 때로는 경란이 남편 조덕배를 데리고 <동백야>를 찾는다. 경란은 <동백야>를 찾을 때마다 과음을 한다. 그리고 혀 꼬부라진 말로 똑 같은 푸념을 한다. 이제 이영철을 미친여자로
위장하여 속이려는 것이다.
<야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강남에 있는 진호빌딩 사장이라구. 내가 지난 기억을 다 잊어버렸다구
무시하지 마. 내 아들이 검사야. 검사라구>
<동백야>에 숨어 있는 정보원들도
조진호 검사 어머니의 술주정에 머리를 흔들었다. 경란이 이렇게 된 것은 경란이 사랑했던 딸 경숙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들을 했다.
경란은
일부러 취한 척하였고 일부러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너희들 내가 지난 기억을 다 잊어먹었다고 날 무시하지 마. 난 무시 받는 것 안 좋아한다구.>
경란은
이영철이 여자로 변장을 해도 남장으로 정장을 해도 늘 제일먼저 알아 볼 수 있었다.
<이진호 개 새끼. 넌 여자로
변장을 하였지만 나는 미친 척 변장을 한다구. 이 개 새끼. 내가
네 피를 반드시 경숙의 무덤에 뿌릴거야.>
경란의
연극은 경란을 아는 모든 사람과 이영철을 속게 했다. 이영철은<동백야>에서 경란을 알아보고 술 취한 경란을 부축해주며 경란이 정말 과거를
다 잊었을까를 몇 번 시험해 보지만 경란은 그럴 때마다 이영철, 이진호를 모른 척하며 이영철을 속인다.
“누구시더라. 이 여 사장님은, 왜 사장님도 나처럼 과거를 다 잊어버렸나. 에이, 사장님은 나만치 이쁘지도 않다. 사장님 나하고 우리 여자끼리 맥주 한 잔 더 할래요?”
경란은
이진호에게 자신이 과거를 잊은 사람으로 알리고 또 알린다. 경란은 이<동백야> 지하실에서, 다시 한층
더 내려가 있는, 지하층 지하실 아지트도 잘 안다.
지하층
지하실에서 벽에 그려진 두 마리 금붕어 중, 작은 금붕어의 꼬리를 누르면 지하방 한 쪽 벽에 세워 논
책장이 옆으로 비켜서고, 그 뒤의 벽면이 갈라지며 비상구가 열리고, 이
비상구는 긴 터널로 청량리 집창촌 시내네 뒤뜰까지 통하는 것도 잘 안다.
경란은
이영철과 사이가 좋던 때 몇 번이나 이 지하층에서 이진호 대좌와 뜨거운 시간들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 지하 아지트의 구조를 아는 사람은 이진호 외에 신성옥과 경란뿐이다. 이제 신성옥이 죽었으니
이 아지트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진호 외에 경란 한 사람뿐이다.
<이진호 개 새끼. 잘 속아줘서
고맙다. 이제 너도 네 꾀에 네 발등 찍히는 거다.>
경란은
이 지하 아지트에 폭발물을 설치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폭발물을 구할 길이 없다.
아지트에 미리 숨어
있다가 칼로 이진호를 죽일까를 생각해 보지만 특수 훈련 받은 이영철을 당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망설인다.
<그러면 맥주에 독약을 타서 죽일까? 그러나
이영철은 얼마나 의심이 많은 놈이던가 그리고 그런 기회가 언제 온단 말인가.>
경란은 <동백야>에 숨어들어가 일층 아지트까지 내려가서 어디 숨어
있다가 이영철, 이진호가 깊이 잠든 후에 이진호의 목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다가 경란은 아주 좋은 생각이 번듯 났다.
<아 그 권총?>
경란이
양재동 땅을 팔아 생긴 큰돈을 이진호 대좌에게 갖다 주었을 때 큰돈을 받은 진호도 기뻤고 혁명 완수를 위해 큰돈을 바친 경란도 기뻤다. 기쁨 중의 기쁨은 남녀의 결합이요 섹스다. 남편을 두고 외간 남자와
맺는 섹스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집에서 늘 먹는 그런 밥이 아닌 고급 음식점에서의 별미 같은 것이었다. 죄의식에 두려움이 겹쳤고 거기에 스릴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진호와
경란은 <동백야> 아지트 지하층 침실에서 한 몸으로
엉켜 혁명 완수를 위한 뜨겁고 스릴 만점인 섹스 파티를 했다.
섹스 파티 후 이진호 대좌는 등허리에
방울방울 땀을 흘리며 아직도 매롱한 경란에게 벽 속에 숨겨놓았던 작은 권총 하나를 꺼내주었다.
“혁명
완수를 위해 이진호 대좌가 김 경란 중위에게 주는 권총이다.”
경란은
대좌가 주는 것이란 말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받들어 권총을 받았다.
둘이는
벌거숭이로 권총을 주고받았다. 둘이는 일어나 북을 향해 부동자세로 나란히 서서 똑 같은 말을 하였다.
“위대하신
수령 동지의 혁명 완수를 위해 나는 살고 죽습니다.”
그리고
둘은 다 키득 키득 웃었다. 자신들의 몰골이 자신들이 보아도 좀 우스웠기 때문이다.
경란은
참으로 오래간 만에 권총을 손으로 쥐어본다. 권총을 잡는 촉감은 예나 지금이나 차디찼다. 벽으로 위장된 벽속에 이런 금고가 그곳에 있는 것을 경란은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래, 그 권총으로 이진호를
죽이는 거다.>
경란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까맣게 잊어버렸던 권총을 생각해 냈고 기억을 더듬어 그 권총을 찾아낸다. 경란은
진호에게 받은 이 권총을, 자신의 집 뒤 소나무 아래 땅을 파고, 방수제가
들은 비닐봉지에 넣어 숨겨뒀었다. 오 연발짜리 작은 권총이다.
경란은 <동백야> 건너편 다방 이층에 앉아 <동백야>를 살핀다. 이진호가 나가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진호가 나가면 지하 아지트에 숨어들어 있다가 이진호가 아지트로 들어올 때 권총으로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