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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13 21:07
정동순/벽과 틈
 글쓴이 : 정동순
조회 : 3,845  

정동순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벽과 틈

비가 내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워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물 마시러 내려와 불을 켜니 벽에 못 보던 흔적이 있다. 뭔가 꾸물꾸물 기어 내린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니 축축하다. 천정부터 길게 줄을 그으며 흘러내린 것이 영락없는 빗물이다. 깜짝 놀라, 곤히 자는 남편을 황급하게 깨웠다.

생각해 보니, 집을 살 때 서류에 굴뚝의 틈을 메우라고 한 것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러 해 겨울을 나는 동안, 틈이 벌어지고 이끼들이 자라서 드디어 빗물이 실내로 스며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미장일하는 사람을 불러 당장 고치자고 남편을 채근했다.

“간단한 걸 왜 몇 백 불이나 주고 사람을 사서 해. 내가 할게!”

남편은 자기가 고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인터넷에서 굴뚝 수리하는 법을 뒤지더니, 시멘트 포대를 사 들고 왔다. 그리고 큰아이와 한나절 지붕 위에서 시끌벅적하였다.

며칠 후 또다시 많은 비가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줄이 생겼다. 빗물이 마치 경주라도 하듯이 줄줄이 벽을 타고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람을 쓰자니까 고집을 부리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잔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이 세 번이면 뭐도 면할 수 있다고 했겠다! ‘참을 인’ 덕에 남편과의 말다툼을 간신히 면했다.

당장은 비 때문에 미장일을 할 수 없었다. 우선 천막 포장을 사다가 벽난로의 굴뚝을 싸 놓기로 했다. 천막을 들고 남편과 함께 지붕에 올라갔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굴뚝을 살펴보았다.

지난번에 남편이 땜질했던 곳은 깨끗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부풀어 오른 몰타르에 파릇파릇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까마귀가 물어뜯었는지 몰타르 조각들이 굴뚝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차가운 겨울비 속에서 남편과 천막을 동여매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살다 보면 방심하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어디 벽에 비 새는 일뿐이랴! 매일 자동차를 이용하면서도 앞뒤 타이어 위치를 교체해 주지 않아 수명이 훨씬 짧아진 타이어가 결국은 고속도로에서 펑크가 났다는 얘기, 배터리가 방전되어 낯선 곳에서 곤란을 겪었다는 일 등, 들은 이야기만도 허다하다.

부부 사이도 그렇다. 오래 살다 보면 아무리 견고한 사랑이라도 틈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서로의 티끌이 전봇대처럼 크게 보이는 시기, 서로에게 무덤덤해지는 시기, 이런 시기가 벽돌 틈새를 메우는 몰타르에 문제가 생기는 때가 아닐까? 이 틈을 제때 메우지 않고 방치하면 치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다.

멀리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혼한 배우자와 헤어졌다고 한다. 두 번 다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학창시절 친구 중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다. 꿈도 많고 마음도 꽃같이 고왔던 친구에게 어째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파경을 맞은 친구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이 전해져 왔다. 부모 때문에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은 또 어쩔 것인가?

결혼한 지 20년쯤 되는 또 다른 친구는 배우자에 대한 실망으로 견디기 어렵다는 고백을 한다. 지금 상태라면 부부 사랑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을 것 같아 너무 두렵다고 했다. 한참 자라는 아이는 셋, 생의 한가운데에서 절망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굴뚝을 포장하고 내려와 시린 손을 녹이며 벽을 관찰했다. 벽에는 빗물이 흘러 내린 누런 자국이 줄줄이 나 있다. 남편을 원망했던 내 마음의 흔적이라도 되는 양 민망스럽다. 곧 페인트칠을 새로 해야겠다. 사실 오래된 집이라 해마다 뭔가 고치거나 바꿔야 할 일이 꼭 생긴다. 그런데 집이나 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오래된 탓으로 원인을 돌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 사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연륜이 쌓일수록 단단히 뿌리가 깊어지는 정원의 수목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 견고했던 벽에 틈이 생기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틈이 생길 때, 사람들 사이에는 더욱 끈끈하고 새로운 몰타르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 몰타르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일까? 서로의 존재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은 아닐까?


따뜻한 마… 13-09-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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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관찰의 눈과 따뜻한 마음이 어우러진 글입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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