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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06 13:59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콩알이 군자란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6,236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콩알이 군자란

 
순한 연둣빛 봉오리가 빠끔히 올라온다
짙은 초록 잎 사이로 내미는 얼굴에 갓난아기의 젖내가 묻어난다. 반가운 꽃소식에 집안 가득 생기가 돈다. 꽃대가 쑥쑥 자라며 키를 더하더니 마침내 주황색 꽃이 하나 둘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활짝 핀 군자란이 고운 신부의 손에 들린 화사한 부케 같다. 주위가 환하다.

십여 년 전, 집들이 때 친구가 하늘색 분을 들고 왔다. 화분의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여린 군자란이 낯가림을 하고 있었다. 연한 잎을 살짝 구부리고 있는 게 가마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어린 색시 같았다

친구의 부모님이 이민 오실 때 신발 속에 숨겨서 가져온 군자란의 자손이란다. 그렇게 우리 집에 시집온 군자란은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 첫째와 둘째는 제 어미만큼 몸집이 자랐을 때 가까운 이웃들에게 분가시켜주었다

셋째는 아직 어린데도 눈독을 들이고 있던 언니가 민며느리 데려가듯 가져가 버렸다. 어린 것을 떼어 보낸 군자란이 딸을 멀리 시집보낸 내 마음을 아는 듯 나와 눈을 맞추는 날이 많아졌다.

배불뚝이 화분이 예쁜 병아리를 품고 있었나 보다. 군자란 옆에 작은 새끼가 눈을 떴다. 두터운 흙을 연한 초록색 부리로 쪼아내며 힘겹게 옹알이를 하더니 어느새 어린 날개를 펼친다

아기의 여린 손을 잡듯 군자란의 순한 잎을 눈으로 품어본다. 포근하다.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마음에 기쁨이 차오른다. 좌우로 정연하게 푸른 잎을 드리운 군자란이 갓 태어난 새끼를 사랑스레 쓰다듬고 있다.

군자란의 본은 남아프리카라고 한다. 그곳에서 피어난 군자란이 동쪽 끝 작은 반도의 나라 한국을 거쳐 이 땅 미국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 얼마나 멀었을까. 건너야 했을 깊은 바다와 높은 산들은 얼마나 험하고 힘들었을까. 모래바람이 이는 황량한 사막의 더위와 추위는 또 어찌 견디었을까. 군자란은 원래 수선화과인데, 그 이름 때문에 흔히 난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어쩌면 군자란은 길고 먼 여행 동안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다시 붙여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무던한 성질 때문인지 여느 집 거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군자란 이름 속에는 이민자들의 서글픈 역사와 삶의 애환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친구의 부모님이 굳이 군자란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신 까닭을 헤아려본다. 문익점이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왔던 것과 같은 간절함이 그분들께도 있었는지 모른다. 어떠한 형편으로 조국을 떠나오면서도 군자의 뿌리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군자란에 담으신 게 아닐까 싶다.

군자란의 푸른 잎 곳곳에 갈색 물이 들었다. 모체에 영양분이 부족하다는 뜻일 게다. 영양제를 좀 주었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나를 탓한다. 분갈이를 하다보면, 겉은 멀쩡한데 속이 텅 빈 뿌리를 가끔 본다. 새끼에게 양분을 다 내어주느라 제 뼈 녹아내리는 줄 모르기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다를 게 없다. 그게 어미인가 보다. 어미 군자란 위에 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새끼 군자란에 잎이 다섯 장 달리면 어미에게서 나눌 수 있는 적기라고 한다. 다섯 손가락이라야 사물을 힘 있게 잡을 수 있듯이 군자란도 다섯 개의 잎을 달아야 비로소 홀로서기를 할 수 있나 보다. 새끼를 모체로부터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어미의 뿌리를 다치지 않고 새끼의 뿌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분리해내야 한다. 썩은 것은 잘라내고 엉킨 뿌리를 정리하여 새 분에 앉혀주고 나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산고를 겪은 어미 곁에 새 분으로 옮겨진 새끼 군자란이 햇살을 힘껏 빨아들인다. 새끼가 뿜어내는 풋풋한 풀 비린내가 귀엽다.

딸이 태기를 알았을 때 영상으로 본 아이의 크기가 콩알만 했단다. 때마침 우리 집 군자란에도 어린 묘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딸은 아이를 콩알이라 불렀고, 나는 앙증맞은 새끼 군자란을 콩알이 군자란이라고 불렀다

군자란이 고귀하다는 꽃말을 갖게 된 것은 머나먼 여행길에 자신의 이름은 잊혔을지라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그 땅을 밝히는 꽃등불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군자란은 어느 정도 추위를 견뎌내야 다음해 꽃대가 길고 화려한 꽃송이를 탐스럽게 피어낸다. 군자는 아무나 그저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일 게다.

콩알이 군자란이 일 년쯤 더 자라면 콩알이 첫 생일 선물로 줄 생각이다. 콩알이가 군자란의 이름과 꽃말을 이해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며칠 지나면 세상에 나올 콩알이를 맞으러 딸의 집으로 간다. 새끼 군자란을 위해 새 분과 흙을 준비하듯 병아리 색 아기이불을 마련했다.

주황색 환한 꽃옹알이를 이불에 새길 아기, 콩알이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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