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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13 20:50
김학인/바람의 길
 글쓴이 : 김학인
조회 : 4,480  

김학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바람의 길

햇빛이 아쉬운 여름은 바람이 더 분주하다. 잠시 전까지 숲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흔들바람은 어디로 비킨 것인지 나뭇잎은 미동도 없다. 눈에 보이진 않아도 바람은 용케도 제 길을 찾아간다. 아니, 눈여겨보면 바람의 길이 보인다.

나뭇가지가 겨드랑이를 들어 길을 터주면 바람과 함께 햇살 한줌이 따라와 은빛으로 반짝인다. 푸름이 무성한 가슴에 잠시 안겼던 바람은 이파리 하나 남겨놓고 훌쩍 뜨고 실바람은 버들가지를 살짝 건드려본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도 애처로운 아네모네의 꽃잎을 쓰다듬어 열어주곤 미련 없이 떠난다. 산에 가면 재넘이를 만나고, 바다에선 파도를 일으키고 몸을 감추는 바람. 멀찌감치 물러섰던 하늬바람은 가을볕에 끌려 나와 과수에 맛을 뿌리고 흩어진다. 동장군을 업은 칼바람이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봄 옷을 갈아입고 살랑거린다. 누가 바람의 탈의장을 본 적이 있을까.
 
바람은 자연의 악기요, 대변자다. 고층빌딩 사이를 누빌 때면 휘파람을 불고, 나뭇잎을 스쳐가면서 피리소리를 낸다. 대나무 숲에선 쏴아~하는 파도를 흉내 내고 저녁 어스름에 문풍지를 울리며 가는 잽싼 몸짓은 다급한 전령을 맡은 것인지.

텅 빈 가을들판에선 바람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현(絃)의 활줄을 튕긴다. 갈대밭에 엎디어 흐느끼는 바람은 어디서 가슴 아픈 사연을 보았을까. 젊은 바람은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와 어울려 함성을 지르며 물장구친다. 어린 시절 광활한 만주벌판의 수수밭 샛길을 걷노라면 사각사각 간지럽던 바람소리가 때로 이명처럼 귓가에 맴돈다. 

바람은 잔잔하게 불지라도 자연의 신음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그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면 분연히 일어나 비구름을 몰아오고, 천둥번개로 땅을 가르고, 바다를 세운다. 명석한 인간의 두뇌가 빚은 문명의 이기는 하릴없이 바람이 제 몫을 끝낸 후에야 허둥거린다.

초등학교 4학년,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학교 관사에 살던 때다. 왜식구조의 넓은 집엔 뒷마당이 있고 쪽마루에 이어진 유리미닫이로 출입을 했다. 어느 겨울 밤, 누군가 유리 창문을‘똑, 똑’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누구? 다시 깜빡 잠드는데 또 같은 소리가 났다.

 틀림없이 손등으로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잘못 들었겠지. 옆의 동생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놓친 잠 줄을 잡는데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그쳤다 한다. 그쯤 되면 겁 많은 내 알량한 상상력이 날개를 단다. 도둑이, 무섭게 생긴 도둑이 밖에서 염탐하면서 적기를 노리는 것이다!

도둑은 아버지가 출타중인 것을 알고 왔을 게다. 어머니를 깨울까? 아니, 좀 더 기다려보자. 네모난 유리창이 희끄무레해질 때까지 나는 호신용 빗자루를 머리맡에 두고 누웠다가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 차리는 그릇소리에 선잠을 깬 나는 슬그머니 마루에 나가봤다. 세상에! 창가의 빨랫줄에 널어놓은 동생의 꽁꽁 언 바지자락이 바람이 불 때마다 유리문을 ‘똑, 똑’ 치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혼자 바람소리에 놀아나다니. 풍성학려(風聲鶴唳)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바람은 흘러가는 것이라지만 흔적이 남는다. 산들바람은 새싹의 흙을 털어주고, 명주바람은 풀잎을 돋게 하는데, 꽃샘바람은 꽃잎을 다물게 한다.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떨어뜨리고 뺑소니치는 강쇠바람, 뱃머리를 삐딱하게 장난치는 갯바람도 있지만, 노대바람은 나무를 뿌리째 뽑고야 일어선다. 만만찮은 수령의 나무를 단숨에 쓰러뜨리고, 평생 이룬 가재를 한 순간에 휩쓸어 가는 바람의 위력. 지난 8월 미 동부 해안지역을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 아이린은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은 자연계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림에 매료돼 화실에서 사십을 넘긴 노총각의 가슴에 이는 바람은 때마침 독신주의 노처녀의 가슴에 파고들어 마침내 주례 앞에 서게 한다. 바람 들어 좋은 날이 된 셈이다. 하지만 믿었던 남편이 일으키는 바람은 온전한 가정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내 자식만을 위해 쏟아 붓는 엄마의 치맛바람은 다른 아이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남이 하면 투기요, 내가 하면 투자라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통에 국가 경제가 들썩거리기도 한다. 홀연히 찾아 드는 춤바람과 노름바람은 또 어떠랴. 그러고 보면 바람 또한 어떤 길로 들어서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낳는다. 빗장을 걸어 가둘 수조차 없는 바람은 그래서 잠재우기도 힘들다.

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바람, 향방을 예측할 수 없는 바람 앞에 누가 손을 쓸 수 있으랴. 문득 풍정낭식(風定浪息)이란 말이 떠오른다. 갈릴리 바다 가운데서 갑자기 배를 덮칠 듯 사나운 광풍과 파도가 이는데 그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한 분이 있다. 천방지축 바람을 다스리는 주인이 있다는 걸 안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저녁바람이 이마를 시원하게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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