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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8 12:12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소가너머가다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4,146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소가너머가다

 
마침내 마당 한 쪽에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었다. 이웃이 나누어준 깻잎 모종과 열무, 상추 씨앗을 심는데, 마음은 이미 초록으로 일렁이고 눈앞엔 푸성귀 가득한 밥상이 어른거린다.

내친 김에 오이와 고추 모종을 사러 갔다. 오이 모종은 없고 시들어 비실거리는 호박 모종 몇 개가 비뚤어진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그중 나아보이는 것 두 개와 고추 모종을 사와 심고 정성을 기울였다.

어느 날 아침 눈꼽만한 상추 싹들이 올라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후로 눈만 뜨면 텃밭에 나가 밤새 자란 상추 잎과 눈 맞추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연두색 작은 치마를 나풀거리며 피어나는 상추 이파리는 아기의 볼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러웠다. 향긋한 들깨 앞에 서면 어린 시절 할머니가 부쳐주시던 깻잎 전 냄새가 코끝에서 솔솔 피어나곤 했다. 작고 하얀 꽃 밑에 달린 고추를 보면 어머님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편찮으신 중에도 아들 먹이려고 고추에 찹쌀 풀 입혀 말리는 번거로운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어머님이셨다.

호박이 열리면 어머님 좋아하시던 호박전을 부쳐 당신 아들 입에라도 넣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호박도 잎을 키우며 옆으로 잘 퍼져가고 있었다. 호박 잎을 따서 된장지지는 데도 넣어 맛있게 먹었는데, 호박잎과 꽃의 크기가 유난히 작은 것 같았다. 처음 짓는 호박 농사인지라 크기가 작은 호박도 있으려니 하며, 호박이 열리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며칠 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호박이 열려야 할 자리에 새끼 오이들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의 손을 이끌고 나가 우리 집에 호박오이가 열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호박을 심었으니 호박이 열려야 하건만 오이가 열렸으니 어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마켓의 선반에 잘못 놓인 호박 이름표만 보고 호박이라 믿었으니, 왕초보인 내가 오이꽃을 작은 호박꽃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는 그렇게 텃밭 여기저기서 삐져나오고 있었다.

이태 전이었다. 작은 선인장의 빨간 꽃이 구석에서 눈웃음을 살살 치다가 나와 눈이 맞았다. 동그마한 자태가 마음에 들어 집에 데려왔다. 마침 커다란 조가비가 있어 거기에 옮겨놓았더니 사막과 바다의 만남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조가비에 새겨진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선인장은 둥근 몸집을 점점 키워갔다. 그 위에 앙증맞게 피어난 세 송이 빨간 꽃은 새색시의 화관처럼 예뻤다.

해가 바뀌어도 선인장은 여전히 예쁜 꽃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신기하다 싶어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손으로 만든 가짜 꽃이 시치미를 똑 떼고 선인장 가시 끝에 요염하게 앉아 있었다. 집에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 신기한 꽃이라고 자랑하곤 했는데…. 얼굴이 빨간 꽃만큼이나 달아올랐다. 선인장 가시에 온몸이 찔린 듯 욱신거렸다.

쉽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탓에 상처를 받은 게 한두 번이었던가. 그도 부족해 이제는 선인장 꽃에 속고, 호박과 오이도 분별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어리석음을 탓하며 텃밭을 바라보고 있는데, ‘소가너머가다’라는 말이 머리를 스쳐간다

소가 넘어갈 수도 있고, 내가 속아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을 제대로 분별하며 사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선인장의 가시만큼이나 많은 촉수를 세우고 산다면 모를까. 꽃이 나를 보고 웃는데, 매사에 분별력 있는 똑똑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선인장 꽃에 속아 넘어간 나를, 언덕을 넘어가는 소가 큰 눈을 껌벅이며 쳐다보는 것 같다.

오이가 길쭉한 제 얼굴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정성스레 오이 잎을 따두었다가 집에 놀러온 친구에게 호박잎이라며 건네주었다. 시골에서 자란 그에게는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으련만, 친구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고맙게 받았다. 여유롭게 속아 넘어가며 내 마음을 오롯이 받아준 친구야말로 참된 분별력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이지 싶다.

선인장은 여전히 가짜 꽃을 머리에 이고 있다. 나를 감쪽같이 속인 꽃이 괘씸해서 떼어내려 하는데 친구가 떠오른다. 환한 얼굴로 오이 잎을 받아들던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미소에 간장종지 같던 마음이 함지박만 해진다.

빨간 꽃이 여전히 눈웃음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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