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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09 13:53
[시애틀 수필-이한칠] 기다림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163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기다림

햇살이 그저 반갑다. 얼마 만인가. 시도 때도 없는 빗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기도 했다.
올 봄이 늦다. 봄이 오는 소리를 줄곧 빗소리가 대신해주고 있다. 봄은 정녕 멀리서 오고 있나. 눅눅하고 질척거리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봄을 이해할 만하다

올 이삼 월에 내린 비의 양이 예년의 두 배로 백여 년만의 최고를 기록했단다. 그래도 시애틀의 비가 싫지는 않다. 나는 무언가를 미루고 싶을 때 비 핑계를 대곤 한다.

오랜만에 해가 났으니, 정원 쪽으로 난 창문을 열어젖혔다. 봄기운이 푸근하다. 수선화는 만발했고, 튤립의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수국은 잎이 돋고, 모란은 새순을 움 틔운다

앵두, 자두나무는 통통한 꽃망울들을 뽐내고 있다. , 내가 딴짓하는 사이에 그네들끼리 제철을 맞이하느라 분주했구나

고개를 돌려 매실나무에 눈길을 주었다. 웬일일까? 매화의 꽃망울은 보이지 않고 마냥 느긋한 모습이다. 내가 가장 기다리던 꽃이 아니던가. 작년에는 1월 말에 제일 먼저 청초한 꽃을 피워 설중매라 불리며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벌써 3월도 지났는데, 아무 기색이 없으니 내심 걱정스러웠다. 매실은커녕 꽃조차 기대할 수 없을까 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때에 꽃피울 것을 미루며 꿈쩍도 하지 않는 매실나무가 나를 닮은 것 같다. 마감 날짜를 코앞에 두고도 글 쓰는 일을 뭉그적거리고 있는 주인을 영락없이 닮았다

책상에 앉아 습작하는 것보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모여 담소할 때가 더 즐겁다. 지난 주말에도 그렇게 즐겼던 덕에 마감 이틀을 앞둔 지금에서야 글을 쓰느라 끙끙거리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비 핑계로 정원 손질이 늦어진 틈을 타고, 새파란 이끼가 집 주변 곳곳에 제 영역을 넓혔다. 마치 오래 비워 둔 집 같다. 나뭇잎이 떨어져 잔디밭을 뒤덮었다. 이래저래 햇볕을 쬐지 못해 연약해진 잔디는 기세등등한 이끼의 등쌀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잡초들도 질세라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기승을 부렸다. 심지어 잔디밭 중간중간에 잔디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만날 때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관계를 맺는다. 그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 물 흐르듯 잘 이루어 나아갈 수도 있다. 반대로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각자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생각해 보는 것도 방법이지 싶다.

나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며 살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일은 가능하면 실천에 옮기려 했고, 그 원칙들은 대부분의 사람으로부터 운 좋게 인정받은 편이다

때로는 서로 다른 생각에 맞닥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빗장을 지르진 않았을까. 어쩌면 정원에 낀 이끼처럼 내 마음 어딘 가에도 그런 더께가 쌓여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참에 정원의 이끼만 걷어낼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질러 두었을지 모르는 빗장이나 쌓인 더께를 훌훌 벗겨야 할 것 같다

잔디에 착 달라붙은 낙엽을 잎 갈퀴로 후련하게 긁어내었다. 집 주변 곳곳에 파릇파릇하게 퍼져 있는 이끼에 퇴치제를 듬뿍 뿌려 주었다. 말라서 퇴색한 수국의 꽃뭉치를 따주고, 라벤더 꽃대를 손질해 주었다. 키가 작은 정원수 속에 박혀 있던 낙엽을 끄집어 내고, 구석구석 뿌리를 내린 잡초들을 싹쓸이해 주었다. 개운하다.

이제야 정원의 모든 식구가 제대로 숨을 쉬며 환호성을 지른다. 나도 긴 호흡을 해본다. 진작 손질해 주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늦게나마 보살펴 주었으니 다행이다

조심스레 매실나무로 눈길을 돌렸다. , 엊그제까지만 해도 봄은 아직 멀었다며 능청을 떨더니, 어느새 가지마다 연분홍 꽃망울을 올망졸망 터뜨렸다. 기다린 보람이 크다. 반갑기 그지없다. 비로소 내가 확실하게 봄을 맞은 느낌이다.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것은, 매화가 대나무, 난초, 국화와 더불어 사군자로 불리어서만이 아니다. 매화는 겨우내 언 땅에서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데다, 맑은 향기 또한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올봄, 나를 애타게 했던 매화는 내게 기다릴 줄 아는 마음과 할 일을 제때에 해야 한다고 되새겨 주었다.

봄바람이 분다. 매화가 만발했으니 이제 매실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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