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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8 03:00
[시애틀 수필-박순실] 잃어버린 고향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814  

박순실(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잃어버린 고향
 
 
26년 만에 내리는 폭설로 한국 뉴스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고속도로에는 엉금엉금 차들이 기어가고 어깨를 움츠린 행인들의 모습은 몹시 추워 보인다. 헬기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온 세상은 함박눈으로 인하여 은색으로 변해있었다.

뉴스를 보던 나는 그 옛날 내 머리 위를 소복이 덮던 탐스러운 함박눈, 고사리 같은 손을 호호 불며 만들었던 눈사람, 아무도 딛지 않은 눈 위에 조심조심 찍어내던 내 발자국들이 하나 둘 떠오르며 한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그리움이 가슴 가득 차 오르며 오래 전 일이 생각난다.

몇 년 전 가을 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국이 아닌데도 그새 몰라보게 변해버린 도심지를 보며 감탄보다는 이 문명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싶었다

그리고 그 대단한 문명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빛 바랜 추억들은 희미한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마음이 허전하다. 사실 한국에 와도 고향 갈 기회가 없어 외면했던 나는 일찌감치 고향으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찾는 고향 길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향에 도착하면 제일먼저 내가 살던 집부터 찾아 보리라. 그리고 고향에 남아있는 친구들도 찾아 보리라는 희망으로 많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들뜬 하동의 마음으로 찾아간 고향은 지하자원 고갈로 많은 사람들의 밥줄인 공장문을 다 닫아버려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도심으로 떠났는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살던 집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답던 이웃들도 찾을 길 없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낯선 건물로 변해 있었고 내 사춘기가 시작되던 중학교는 운동장만 덩그러니 옛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 저곳 사람을 찾아봤지만 내가 찾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으며 하룻밤을 묵을 여인숙도 없었다. 고향이 없어졌다. 내가 꿈을 키우며 자란 내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낯선 타향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서있는데도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는 내 마음은 시린 겨울이었다.

사실 잃어버린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향만은 아니다. 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서울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살던 강남의 집도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곳엔 끝도 안보이게 높은 아파트가 꽉차 있어서 도무지 꿈에 그리던 내 고향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제3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시애틀 공항에 도착하니 이제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입국 심사대 앞에서 또 한번 무너져 내리는 허탈감을 맛본다

알아듣는 말보다 못알아 듣는 말이 더 많아 끙끙대며 대답을 해야 하는 언어의 장벽, 장대같이 큰 미국인의 파란 눈을 쳐다보며 나는 또다시 이곳이 고향이라 착각한 꿈에서 깨어난다

고향을 잃어버렸다. 되돌아 가봐도 타향이요, 20년을 살아도 정들지 않는 이곳, 또한 낯선 타향인 것을 느끼며 로켓에 떨어져 나간 쇳조각처럼 외롭고 쓸쓸함을 느낀다.

오늘처럼 고국의 뉴스를 들으며 화면 가득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면 허전하고 쓸쓸했던 그때 기억은 사라지고 나는 여지없이 어린 시절 눈밭에서 뛰놀던 고향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향에 가고 싶다. 이번에는 지난 여행에서 찾지 못했던 그곳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추억 한줌 찾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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