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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3 13:52
[시애틀 수필-이한칠] 등불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4,159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등불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70년대 말, 젊은이들에게 한창 인기였던 촛불의 노랫말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팍팍했던 그 시절엔 낭만적인 노래였다.

자신을 녹여 빛을 발해 주변을 밝힌다는 촛불. 불꽃이 화려하여 우아한 듯하지만, 그 가녀림 앞에서 우리는 쉽게 겸손해진다. 크고 작은 행사의 끝마무리에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다짐을 끌어내는 데에 촛불은 큰 역할을 한다

얼마 전에 3 4일 일정의 피정에 참여할 기회를 가졌다. 여러 교육을 받은 뒤 마지막 날, 나는 나를 위해 다른 이들이 들어 준 촛불에 크게 감동받았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촛불이 주는 의미를 나름대로 마음에 담고 있다. 해마다 성탄을 준비하며 4주일 동안의 대림 시기에 촛불을 밝힌다. 또 부활을 준비하며, 부활성야에 진행되는 빛의 예식에서 우리는 촛불을 든다. 살다 보면 잊어버리기 일쑤이지만, 빛이신 그분을 닮은 삶을 살겠노라고 그 순간만큼은 착하게 다짐하곤 한다.

우리 집 기도방에는 작은 촛대 두 개와 꽃병 한 개가 있다. 꽃을 준비하는 것은 아내의 몫이지만, 묵주기도를 드릴 때 나는 보통 촛불을 켠다. 빛으로 오신 분을 모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촛불과 함께하면 무언가 정성을 다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어느 날, 아내는 집 안에서 켜놓는 촛불이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넌지시 말했다. 초가 타는 동안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고, 그을음이 코를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아내는 식물성 천연 재료로 만든 초를 구해 보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기도방의 촛불은 사라졌다. 꽃병에 장미가 풍성하게 꽂혀 있어도 뭔가 덜 채워진 것 같이 허전했다. 아마 나는 기도나 명상 중에 촛불이 가져다 주던 따스함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시애틀의 늦은 봄, 긴 우기가 지나간 듯하다. 오랜만의 화창한 이른 아침이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동쪽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정원에 햇살이 맑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막 낮게 떠오르는 해 덕분에, 나무 울타리 틈새로 화려한 햇빛이 한 줄기씩 비집고 들어왔다. 사이사이로 평행선을 이룬 쭉쭉 뻗은 햇빛 줄기가 아직 이슬을 달고 있는 꽃밭에 와 닿았다. 

그래서일까. 햇살을 업고 있는 튤립이 황금빛과 진홍빛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한껏 맵시를 내며 싱그러운 자태를 뽐낸다. 녹색의 튼튼한 꽃대에 힘이 넘친다. 다만 햇빛 줄기를 배경으로 삼았을 뿐인데, 매년 보여 주던 튤립의 모습과는 다르게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주변에는 앙증맞은 파란색 브루네라 꽃송아리가 넉넉하게 깔려 있다. 그 속에서 노란 튤립 세 송이와 진홍빛의 튤립 한 송이가 조화를 이루었다. 튤립의 간격도 알맞고, 키와 크기도 저마다 다른 개성 있는 모습으로 주변 꽃들을 잘 어우르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우리들이 모여 서로를 인정하고 어우르며 사는 세상, 바로 내가 바라는 모습과 똑 닮았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선물해 주었을까.

이 소중한 그림을 제대로 잘 담아낼 수 있을는지, 조심스레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빛을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던가. 살가운 아침 빛을 받는 튤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명암을 좌우하는 빛의 양에 따라 사진의 색감이 달라지므로, 나는 딱 알맞은 빛의 순간을 포착했다. 사진을 찍다 보면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정성을 다한 덕인지 꽤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었다. 

이슬을 머금은 진홍빛 튤립이 또렷이 살아 있다. 매년 노란 튤립인 줄만 알았는데, 사진으로 자세히 보니 꽃송이 주변은 황금빛이고, 도톰한 중간 부분이 연한 노란색이다. 그 모습이 튤립꽃 속에 불을 켜놓은 듯, 영락없는 노란 등불이 되었다

말 그대로 등에 불을 켜고 어두운 곳을 밝혀 준다는 등불. 흔히 선구자를 이 사회의 등불이라 일컫는다. 앞날에 희망을 주는 존재를 의미하는 등불이 귀하게 여겨진다.

이참에 촛불 대신, 노란 튤립꽃 등불을 밝혀야겠다. 나는 컴퓨터 화면에 그 작품사진을 얼른 띄웠다. 볼수록 새록새록 사랑스럽다. 창에 뜬 사진 화면의 어느 한구석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노란 튤립 등불, 촛불과 달리 꺼지지 않는 황금빛 등불이다.

보고 또 보아도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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