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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4 23:13
김윤선/눈이 지고 있다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473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눈이 지고 있다

집집마다 지붕들이 허물을 벗고 있다. 눈 속에서 옹송그리고 있던 잔디들이 말간 얼굴을 내밀고, 빈가지에 맺힌 물방울이 영롱하다. 가지마다 괴어 있던 얼음이 녹아 내리면서 뒤뜰의 침묵을 깨고 있다

울엔 역시 눈이 내려야 제 맛이다. 제 아무리 삭풍이 불고 비가 잦은들 세상을 이렇게 순화시킬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밤새 내린 눈을 만나는 날은 더욱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어둠을 걷어내려 커튼을 젖혔을 때 불현듯 만나는 놀라움이란

질 좋은 하얀 면 호청을 깔아놓은 듯 세상의 추함을 모두 덮어버린 아름다움, 그건 들춰내고 까발리는 우리의 세상살이에 이렇듯 소리 없이 덮어주는 미덕을 보여주는 듯하다.

처음 눈이 내렸을 때 사람들은 은근한 걱정 속에서도 그를 반겼다. 오가는 사람끼리 실없는 웃음을 나누고 아이들은 썰매를 끌고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그 바람에 동네엔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뜰에도 장난기가 흘렀다

웃자란 잔디는 눈 더미 속으로 바깥 소식을 전하느라 목을 빼고 있었고, 굵은 가지엔 큰 눈꽃을, 작은 가지엔 작은 눈꽃을, 진통도 없이 피워낸 빈 가지들이 시침을 떼고 있었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가는 가지들에게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는 듯했다.

뒤뜰은 아이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었다. 꽁꽁 얼은 겨울 꽃들이 숨소리마저 죽이자 간지럼을 태우려는 듯 남아 있던 나무 이파리 하나가 살짝 내려앉았다

눈치 빠른 바람이 이 참에 재빨리 이파리를 날려 버렸다. 공연히 제 새끼 하나만 잃은 나무가 항의하듯 크게 몸을 들썩이는 바람에 뜰엔 우수수 눈발이 휘날리고, 웅크리고 있던 작은 나무들이 잔기침을 하면서 덩달아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문에 뜰엔 사막여우의 발자국처럼 홈이 패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만난 눈은 유별났다. 밤중에 잠이 깬 나는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밝은 빛에 눈이 갔다. 전등불을 켜 놓았나? 스위치는 내려져 있었고, 마당에 쌓인 눈이 담 너머 가로등 불빛을 반사시킨 것이다. 흰색이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빛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모든 색상을 다 떠나 보내고 남은 빈 공간, 그 공간에 또 무슨 색이 필요할까. 그러고 보면 눈은 천연의 빛이요, 무심의 증표인지 모르겠다. 나붓나붓 소리 없이 내리는 가벼움과 어디든 소복소복 쌓이는 너그러움이 세상의 순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눈 덮인 뜰이 빈 뜰이 아니라 세상을 품어 안은 넓은 가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눈이 동화 같은 세상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건 이번에도 잘 보여 주었다. 순식간에 당한 정전 사태로 생활이 일순 멈추는 듯 했고, 한기를 견디지 못한 낡은 차들은 길에서 생명이 꺼져갔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경사 길에서도 차는 사색이 되었고, 빙판길은 몸의 중심을 허물어뜨렸다. 홀연히 만난 시간들, 어떤 이는 참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루에 책을 두 권이나 읽는 한가함을 맛보았다고도 했다. 식혜를 만들고 호박죽을 끓이면서 잃었던 자신을 찾아가는 느낌을 가졌다는 이도 있었다.

세상의 바쁜 일들이 허구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삶의 겸허함을 느끼게 해 준 눈, 세상에 자연의 의지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이 녹는가 싶더니 이내 사윈다. 담장 위에 소담스레 쌓여있던 눈덩이가 푸석하니 녹아 내리더니 빈 가지에 얹혀있던 눈꽃들도 하릴없이 뚝뚝 떨어진다. 물러날 때를 아는 때문일까, 연연하지 않는 모습들이 대견하다. , , 실없이 떨어지는 눈덩이가 내 눈엔 새빨간 동백꽃을 닮았다.

봄눈 녹듯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동장군이 뿌려놓은 두꺼운 얼음도 따뜻한 봄의 입김 앞에서는 배기지 못할 터, 얼어붙은 경기도 이쯤 풀어졌으면 좋겠다. 얼음을 녹이는데 따뜻함이 제일이듯 얼어붙은 불경기를 녹이는 데 이웃 간에 나누는 훈훈한 사랑만한 게 또 있을까.

잔설만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 뜰은 예의 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땅에 고개를 처박고 허리가 꺾여 있던 나무들이 그새 키를 키웠다. 물기 머금은 모습들이 건강하고 기운차 보인다. 고통을 이겨낸 자긍심이랄까, 설핏 그런 게 눈에 띈다. 시나브로 뜰은 한층 성숙해져 있다

얼음 속에서도 꿋꿋이 생명을 지켜낸 인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임을 저들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성싶다. 눈이 지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뜰엔 온통 눈이었다. 나풀나풀 흩날리던 눈이 점차 떡가루처럼 굵어지더니 마침내 온 뜰을 점령했다. 장엄하고도 화려한 모습, 발목까지 쌓인 눈은 목화솜 이불마냥 따뜻해 보였지만 실은 냉기 그 자체였다. 난방 온도를 2도 이상 올리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유리 창틈으로 끼어든 냉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건 또 다른 카리스마였다.

**2012년 2월 한국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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