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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16 15:05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짧은 가출, 긴 외출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053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짧은 가출, 긴 외출

 
푸른 잔디 마당에 아침이 환하게 내려 앉았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우거진 속에서 하얀 팔을 길게 뻗어 집의 경계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담장이 정겹다

길을 건너가는 바람의 잰 걸음에 나뭇잎들이 몸을 뒤척인다. 담장 너머 긴 나뭇가지 아래 설핏 난이의 그림자가 보인다. 어젯밤에도 난이가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 날이면 몇 번이고 대문 밖을 내다보곤 한다.

제 몸집보다 훌쩍 커버린 새끼들이 먼저 먹을 수 있도록 언제나 자리를 내어주던 우리 개 난이. 새끼들이 다툴 때면 나무라고 혼내는 모습이 사람과 다를 것 없는 당찬 어미였다. 그래서였을까. 식구들 때문에 속이 상할 때면 난이에게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눈빛으로 내 마음을 읽어주고 도닥여주던 난이는 오랜 친구처럼 편했다. 아이들은 내 몸짓이 난이와 똑같다고 놀려대곤 했다. 십여 년을 곁에서 서로 지켜보며 살았으니 어찌 닮지 않았을까.

난이는 높이 뛰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매일 높이 뛰는 연습을 열심히 하더니 과연 얼마 있지 않아 단숨에 담장을 뛰어넘어 사뿐히 착지할 만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새끼를 가진 무거운 몸으로도 낮은 문지방 넘듯이 가볍게 담장을 넘나들었다. 마음대로 나다니다가 무슨 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럽긴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난이의 거침없는 행보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난이의 그림자를 좇던 눈길이 오래 전 어느 밤길로 이어진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달랑 지갑 하나 들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난 것을 애꿎은 남편에게 화살을 돌리며, 야반 시위를 벌인 것이다

발길이 끊긴 아파트 숲의 싸한 밤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는데, 발은 이미 큰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차가운 밤기운을 심호흡으로 몰아내며, 택시를 타고 고속터미널로 갔다. 심야 고속버스를 타보는 것도, 혼자서 친정집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삶에선 여전히 풋콩 같은 비린내가 폴폴 나던 때였다. 갑옷처럼   부담스러웠던 맏며느리의 무거운 옷을 훌훌 벗고 잠자리 날개옷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곳, 막내딸의 일탈을 한번쯤은 눈감아줄 수 있는 그곳, 부모님이 계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과 상황이 맞아 떨어진 그 밤, 나는 보란 듯이 심야 고속버스를 탄 것이다.

세상이 깊은 잠에 빠져든 시각, 느닷없이 들이닥친 딸을 보고 부모님은 밤길에 도깨비를 만난 듯 놀라셨다. 갑작스레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다음 날 돌아갈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장 되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머니는 날이나 새면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그날 밤 나는 십여 년 만에 다시 엄마의 어린 딸이 되어 곤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밝자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는 시늉만 하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에 오르자, 지난 밤의 결기는 흔적도 없고 고물거리는 아이들만 눈에 어른거렸다. 더 이상 엄마의 막내딸이 아닌 세 아이들의 엄마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십 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가족들은 그 일을 엄마의 가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달콤한 일탈을 꿈꾸지 않았을까. 어릴 땐 어린 대로,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 든 대로 야무진 일탈을 꿈꿀 수 있기에 남 모를 미소 허공에 날리며 열심히 하루를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난이도 그랬을까. 담장 안의 세상이 난이에게는 좁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가 되기보다는 핏속에 흐르는 야성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꿈꾸어 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안전한 자유가 보장된 울타리는 난이를 가두는 벽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난이가 그토록 담장 뛰어넘기를 열심히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나는 지금 여기에 와 있다. 모든 울타리의 경계에는 기쁨과 고통이 나란히 서서 나를 맞아주었다

그 안에 들어서면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발을 맞추며 걸어야 했다. 더러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비틀거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걷다 보면 어느새 삶의 눈이 트이곤 했다. 그런 발자국들이 모여 삶의 지경을 넓혀주었지 싶다.

담장 너머로 난이의 발자국을 더듬어 본다. 나는 담장 안의 이 만큼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난이의 세상은 어디까지 펼쳐졌을지 궁금하다. 담장 밖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청설모를 올려보며 함께 이야기 하던 난이. 나도 난이와 눈을 맞추고 앉아 오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가출이 아닌 긴 외출 이야기를.

가슴팍까지 키를 낮춘 하얀 담장이 난이가 떠난 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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