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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23 13:54
[시애틀 수필-김학인] 밑줄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364  

김학인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밑줄

 
책을 정리한다. 책장에서 차마 밀어낼 수 없어 남겨둔 책들을 더 추리기 위해 한 권씩 들춰본다. 어떤 책에는 여백에 작은 글씨의 낙서가 있고 특히 밑줄 친 부분이 많다

그들은 이 밑줄 때문에 아직 책장에 남아있는 것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털썩 앉아 책을 펴 든다. 다시 읽어보며 밑줄 치던 마음으로 돌아간다. 밑줄에서 생각이 머문다. 생각이 깊어진다. 밑줄에서 희망을 본다

밑줄에는 내가 하고자 했던 바로 그 말이 대신 앉아있기도 한다. 밑줄 안에는 사랑이 숨 쉰다. 밑줄에서 향기가 난다. 잊었던 향기는 내 감각을 자극하여 색깔로 살아나기도 한다.
 
러시아의 저항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글귀다.

마음에 좋다는 감동을 처음 느꼈던 것은 저 감방의 썩어가는 짚더미 위에 누워있던 때뿐이었다. ……… 이로써 나는 너, 감옥이 내 생애 중에 있었음을 인하여 너를 축복하노라.(수용소 군도)
 
짚더미가 썩어가는 냄새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감방은 어둡고 칙칙한 작은 공간이다. 언젠가 산골의 외양간에서 마소의 배설물이 배인 짚더미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들숨을 멈추고 얼른 피했던 기억이 난다

감방의 수인囚人이 치러야하는 고된 노동, 가혹하고 비참한 하루하루, 온갖 굴욕을 참아내며 생존을 이어가는 영어囹圄의 몸. 그에게 몸을 누일 수 있는 짚더미는 포근한 보료이고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더없이 안락한 침상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영혼의 평온을 맛볼 수 있었던 곳. 그것도 처음으로 말이다. 그래서 ‘감옥이 그의 생애 중에 있었음을 축복’했다. 활자에서 저자의 육성을 상상하며 읽게 되는 대목이다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과 역경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깊은 차원의 고통과 즐거움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되씹으며 사랑의 본체에 감격한다.
 
20세기 그리스의 대표적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 聖化(성화)’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라고 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
 
메토이소노란 이를테면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경계 상태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이르는 것이다

포도주는 어떻게 거룩한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일까. ‘최후의 만찬’ 식사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들어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 라시며 마시도록 권한다

그 포도주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피를 흘린 거룩한 사랑이다. 성체, 빵이라는 외적인 형상 속에 본질적으로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비유하는 것이니 이것이 ‘거룩하게 되기’의 통로가 아닌가

나는 성찬식에서 포도주 잔을 수십 번 비웠고 성체를 상징한 빵 조각을 번번이 받아먹으며 그 거룩한 사랑이 내 몸의 탁한 혈관 속에 스며들고 속된 몸의 세포마다 번져가길 원했다

그러나 아직도 ‘거룩하게 되기’를 탐하며 주변에서 맴돌 뿐이다. 카잔차키스는 얼마나 깊은 영혼을 가졌던 것일까.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 가치의 깊음을 알기 위해 얼마나 더 쓸어내야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일까.
 
글의 재창작이라는 번역의 대가요, 탁월한 문장가로 꼽히는 이윤기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헤치며 비참함을 들어올린다.

내가 여기에서 비참함이라고 하는 것은 속사정 모르는 무책임한 찬사에 은밀하게 행복해한 데서 오는 비참하다는 느낌, 뻔뻔스럽게 그런 찬사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 찬사에 걸맞은 어떤 내재율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비참한 느낌을 말합니다.( 위의 같은 책)
 
나는 이 부분에서 두터운 부끄러움과 가벼운 위로를 동시에 느낀다. 글뿐 아니라 친지들과의 대화에서도 경험하는 비참함이다. 나에 대한 과대평가를 들으면서 은근히 즐기지만 그것이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의 함량을 알기에 그 이상을 넘는 평가에 선뜻 나서서 부정을 못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구겨지고 비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걸출한 작가 이윤기도 그랬다니. 그런 감정은 나만 갖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일말의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그 위로는 슬픈 억지여서 오래도록 나를 붙들고 있다.
 
일상으로 내려가 본다. 밥상에서 입맛을 돋우는 김치에 담긴 진실에 대하여.

........갖가지 재료의 형태와 맛이 그대로 살아있는 풋내 나는 겉절이가 신선함이 생명이라면, 오랜 숙성 끝에 그윽하고 웅숭깊은 맛을 내는 것은 묵은지이다. 모든 김치는 그 사이에 있다. 김치가 익는다는 것은 밭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나온 갖가지 재료들이 한데 어울리는 것이고, 파득파득하던 제각각의 성질을 죽이는 것이고, 오래 참아내어 마침내 하나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모든 재료의 각각의 합보다 더 훌륭한 맛으로 완성된다. 김치의 진실은 성숙하는 모든 것에 관한 진실이기도 하다. (성숙하는 모는 것의 비밀 - 성혜영)
 
그렇다. 성숙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맛이 깊은 김치에는 성숙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울리면서 각각의 독특한 성질을 죽이고 오래 참아내어 마침내 하나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한 맛을 낸다는 놀라움. 특별히 그윽하고 웅숭깊은 맛을 내는 묵은지는 접하기 쉽지 않다.

이는 김치뿐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적용되는 이치다. 한 가정도 화목하려면 내 성질 죽이고, 내 고집 내려놔야 한다

양보하고 서로 존중하며 더불어 살 때 비로소 아름다운 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지. 오랜 훈련 끝에 감동을 전하는 심포니가 그렇고 합창 또한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맛난 김치를 먹을 때마다 내가 아니라 우리로 살아가는 지혜를 되새기면서 조금씩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그어진 밑줄 안에서 살아간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시작된다. 천지창조의 둘째 날, 하나님은 모든 물을 한데 모아 바다라 하시고 뭍을 드러나게 하신 후 이를 ‘땅’이라고 밑줄을 그으셨다. 

바다가 육지(땅)보다 높은 네덜란드 같은 나라도 있으나 하나님이 밑줄로 땅을 구별하셨기에 안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으면 사유의 뜰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 속에 새삼 왜소해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꿈이 하늘 위로 나풀거리면 경이로움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래서 나는 밑줄 긋기 습관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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