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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18 02:49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이름표 붙이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838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이름표 붙이기
 
이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겠지. 일주일 동안 홀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남편을 위해 냉장고를 그득히 채웠다. 찬기마다 이름표를 붙여 놓았으니 뚜껑을 열어보지 않고도 쉽게 꺼내서 먹을 수 있을 게다. 오랜만에 냉장고 안이 산뜻해 보인다.

미색 테이프, 유성 매직펜과 가위. 요사이 내가 부쩍 가까이하는 문방삼우(文房三友)이다. 접착력도 좋고 깔끔하게 떨어져서 얼룩이 생기지 않는 테이프에 갓 배달된 신문 냄새가 나는 매직펜을 들고 이름을 적는다

더덕, 쌈장, 연어, 깻잎 등등 그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가위로 반듯이 자른 테이프를 찬기에 붙여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으면 드디어 완성, 무슨 큰일이라도 한 듯 뿌듯하다.

이름표 붙이기에 재미가 들렸다. 각종 양념통과 반찬그릇은 물론 서랍장 손잡이에도 반팔, 바지, 내의, 양말 등이 적힌 테이프를 붙였다. 유난히 찾는 손이 더딘 남편을 위하는 아내의 배려라는 말도 덧붙여 두었다.

자잘한 것들을 넣어두는 서랍을 열었다. 정리를 한다고 하지만 늘 흐트러져 있는 곳, 사소한 것에도 쉽게 흐트러지는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문방삼우의 도움을 빌어 정리를 시작했다. 크기와 종류별로 비닐 백에 넣어 이름표를 붙였다

큼직한 글씨가 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랍이 새롭다. 천방지축 뛰어놀다가 이름표를 달고 입학식장에 줄을 선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반듯하게 접어진 손수건과 함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다니던 코흘리개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이후로 여러 개의 이름표가 그 위에 덧붙여졌다. 어떤 것은 세월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고, 한때는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던 것이 어느새 뚜렷하게 새겨지기도 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행복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떼어 버리고 싶은 부담스러운 것도 있다.

이름값을 하며 사세요?”뜻밖의 질문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저 이름값을 하려고 노력할 뿐이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은 테이프처럼 붙어서 늘 나를 따라다녔다.

애면글면하면서 오늘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붙은 이름표 때문일 게다. 테이프처럼 마음대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까지 붙어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어떤 이름표는 문신처럼 새겨져서 어딜 가도 떼어낼 수 없는 나 자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많은 무리가 따를 뿐더러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함부로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것도,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며 끌어주던 것도 ‘엄마’라는 이름표였다. 오래 전, 요령도 익히지 못한 채 무리하게 일을 하던 중에 손목에서 뚝, 소리가 났다. 순간 마음의 힘줄이 뚝 끊어지면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름표 때문에 나는 눈물을 꾹꾹 씹어 삼키고 말았다

아픔이 할퀴고 간 자리에 이제는 굳은살과 단단해진 근육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삶이란 자신에게 붙은 이름표를 지켜나가는 처절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눈물겹지만 귀하고 아름다운 단 하나의 이라는 이름표.

남편을 위해 시작한 이름표 붙이기가 이젠 나를 위한 것이 되었다. 냉장고만 봐도 그렇다. 음식을 준비할 때마다 이것저것 열어보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어 좋고, 묵히는 것이 없으니 음식물 낭비가 훨씬 줄었다. 뒤늦게 터득한 생활의 지혜 운운한다

테이프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나의 속내를 그이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진즉 이름표를 붙였더라면 구박을 덜 받았을 거라고 투정을 하면서도 얼굴은 환하다. 헛헛한 바람이 이는 마음 귀퉁이에 테이프를 꼭 붙여둔다.

이름표를 떼어내고 깨끗이 씻은 그릇들이 마치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것처럼 보인다. 저 안에 무엇이 담길지, 어떤 이름표가 붙을지 기대가 된다. 단지 이름 적힌 테이프를 붙였다 뗐다 할 뿐인데, 내 안에서도 무언가 떨어지고 다시 붙는 듯한 움직임이 조금씩 감지된다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그 움직임이 흐트러진 내면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떠나보내야 할 것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자리바꿈을 하는 소리와 움직임을 뚜렷이 느끼고 싶다.

안팎으로 여전히 정리해야 할 곳이 많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낼지 모른다. 혹시 그동안 잘못 붙여놓은 것은 없는지, 편견과 오해로 인해 왜곡된 이름표가 붙어 있지는 않은지 꼼꼼하게 둘러봐야겠다. 문방삼우와 더불어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잘 지내리라 다짐한다.

내게 어떤 이름표가 더 붙여질까. 테이프를 붙이려던 손이 잠시 멈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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