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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27 01:19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두 번째 손님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691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두 번째 손님

 
거침없이 늘어가던 몸무게가 어느 날부턴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작아서 입지 못하던 옷들을 다시 입을 수 있다는 반가움에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력이 몹시 약해진 후에야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병원을 찾았다. 갑상선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요즘 아주 흔한 병이고 치료도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 한다. 소리 없이 내 몸에 들어와 기운을 온통 빼앗고 몸무게마저 제 맘대로 움직이는 녀석의 정체가 궁금했다. 지금 나타난 모든 증세는 자가 면역 기능이 약해지면서 갑상선호르몬의 분비량에 문제가 생겨 나타난 것이라 했다.

청하지 않은 손님이 또 찾아왔다. 오십견 이름표를 달고 왔던 녀석이 이번에는 갑상선이라는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하지만 녀석을 쫓아내려고 요란을 떨기보다는 도닥거리며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손님 대우를 해주며 함께 지내다 보면 녀석 또한 손님 노릇을 할 때도 있다. 녀석이 가끔씩 조그만 상자를 내밀곤 했다. 거기엔 보살핌, 배려, 가족, 사랑, 나눔 같은 소중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불청객 오십견은 그렇게 나의 첫손님이 되었다.

어깨 위에 올라앉아 소란을 피우던 첫손님과는 달리 이 불청객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비밀요원 같다. 녀석의 등장으로 평온하던 집안에 긴장감마저 일었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남편의 손이 따뜻하다. 극진한 대우에 잠시 환자 노릇이 좋을듯싶다가도,
약을 건네는 그이의 손을 보면 이내 정신이 든다. 녀석을 빨리 떠나게 하려면 의사의 처방을 잘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약 먹기에 게으른 나를 향해 두 개의 작은 알약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제부터는 꼬박꼬박 시간을 지켜가며 약을 잘 먹어야 한다고.

우리 집에도 현판 하나 걸어두고 싶었던 몇 해 전, 마침 서각을 접하게 되었다. 나무를 새기며 마음도 새겨보고 싶었다. 서각용 칼과 망치를 들자, 고향의 봄을 노래하던 마음에 울긋불긋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먼 이국 땅 한 구석에 자리한 우리 집 자그마한 현판 아래 아득한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겨날 것 같았다.

목판에 칼을 처음 대면 손끝이 떨리고 호흡이 멈춰 선다. 남겨야 할 부분과 파내어야 할 부분의 경계를 가르는 일이 쉽지 않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칼과 망치가 균형을 잃어 칼이 빗나간다. 글자의 몸체를 따라 날 선 칼로 선을 두른 다음 글자 외의 부분은 계속 파내려 가야 한다.

글자의 원형을 다치지 않고 목판의 절반 깊이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네모진 판에 글자가 드러나고 바닥과 글자의 경계가 뚜렷해질 즈음 망치 소리가 마음을 두드린다. 하얗게 드러난 나무의 속내를 읽으며 결에 새겨진 나무의 삶을 헤아려 본다. 흐트러진 마음을 걷어 목판에 내려놓는다.

칼과 망치질이 계속 될수록 남는 것과 버려지는 것의 구분이 확실해진다. 바닥이 낮아질수록 글자는 더욱 도드라진다. 바닥을 고르고 사포로 정성껏 다듬어진 목판은 정결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잔잔한 무늬를 새긴 바닥에 채색을 하고 글자에 옷을 입히면 비로소 양각 기법의 작품이 완성된다.

드디어 우리 집 거실에 새끼 현판이 걸렸다. 반듯한 모습에 그간의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앞에 서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잠든 아기 들여다보는 어미 마음 같다. 옛사람들의 운치를 나도 조금은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의 수를 더해가면서 서각 삼매에 빠져들곤 했다. 목판을 마주할 때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생각하게 된다. 새겨야 할 글자에 따라 버려야 할 부분이 달라진다. 자칫하면 글자 모양이 일그러지기도 하고 망치가 손등을 때리기도 한다.

내 몸에서도 그랬다. 어느 순간 균형을 잃은 호르몬이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일상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오십 고갯길에서 맞닥뜨린 복병이 이쯤에서 삶을 돌아보라 한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정말 바빴다기 보다는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지키지 못해 매일 허둥대며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의 경계를 제대로 긋지 못하는 어정쩡한 그림자 하나가 고갯길을 넘고 있다.

오솔길을 걸으며 목판을 생각한다. 목판에 그어진 경계란 어쩌면 숲 속에 난 작은 길과 같지 않을까. 오랫동안 도시의 아스팔트 길에 익숙해진 눈이 작은 숲길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오솔길이 여유롭게 그려놓은 숲의 경계가 눈에 들어온다.

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에 마음이 닿았다. 내 안에 샬롬(평안)을 새기고 싶었다. 작은 목판 위, 칼과 망치가 지나간 자리에 눈물이 떨어지곤 했다호된 망치질을 마다하지 않은 조각 나무는 마침내 샬롬으로 거듭 태어났다

글자와 바닥이 균형을 이룬 작은 목판이 아름다웠다. 목판은 내 안에 평안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로 나무 조각을 보면 평안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샬롬을 새겨서 주곤 했다.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내면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욕심에 마음의 균형이 흔들리면서 평안이 깨어지고 몸의 균형마저 잃은 게 아닌가 싶다.

작은 알약의 힘이 무척 세다. 더 이상 체중이 줄지 않는 걸 보면 동그란 약이 녀석을 힘껏 밀어붙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얼마 있지 않아 이 불청객은 나를 떠나갈 것이다. 그간 흐트러졌던 일상의 리듬이 차츰 안정되면서 녀석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나를 돌아보면서 평안을 다시 새길 수 있는 것은 녀석 때문이다.

내 안의 목판을 두드린 것은 두 번째 손님 갑상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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