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 에세이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어떤 현자가 책이 태산처럼 많아 아무리 읽어봐야 한 줌이다. 그러니 아예 책을 읽지 말라 했다'고 들었다. 책이 지금보다 턱없이 귀했을 그때도 그랬는데 우리나라 대형서점에 한 해 등록되는 신간만 5만 권이 넘는다는 지금은 오죽할 건가.
일주일에 두 권의 책을 꼬박꼬박 읽는다면 상위의 다독가라고 봤을 때 그래봐야 일년에 100권이 채 안된다. 5만 권에 비하면 조족지혈, 그러니 궤변이나 양으로만 따진다면 백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나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나 '오십보백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책이 이처럼 쏟아지고, 독서의 시간과 비용에 한계가 있다 보니 정말 좋은 책인데 놓쳐버리는 책이 한두 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놓쳤을 책 중에 정말 ‘놓치기 아까운 책’임을 최근에 알게 된 책이 손철주의 에세이 '꽃 피는 삶에 홀리다'이다.
모 소설가의 문장을 극찬하자 문학과 가까운 삶을 사는 지인이 "아직 미문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탓"이라며 추천해 알게 됐다. 매력적인 제목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초판이 2009년에 나왔으니 8년이나 됐지만 꾸준히 읽히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 싶다.
명불허전, 지인의 추천은 빈말이 아니었다. 당연하겠지만 대개 어떤 한 분야에 깊은 내공을 가진 사람이 그 분야에 대해 쓴 경우 좋은 책이 많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대표적이다. 신문사 미술담당 기자와 미술평론가를 업으로 해 온 저자 손철주의 이 책은 국내외,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서화(詩書畵)를 매개로 쓴 신변 에세이다.
실개천의 물처럼 편하게 흐르나 고급스런 문장 사이사이 문학 애호가가 아니면 끌어들일 수 없는 고시나 현대시들이 독서의 운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마치 가수 이동원, 박인수가 이중창으로 부르는 정지용의 시 ‘향수’를 책으로 듣는 것 같다. 각설, 유려한 문장과 그림과 시와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책이 이 책이다.
‘아뿔싸, 문 열자 봄이 가고 버들개지가 진다. 구름 가고 구름 와도 산은 다투지 않는데,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삶은 이운다. 짧아서 황홀하다, 말하고 싶다’는 손철주의 첫 글은 ‘꽃은 피고 지고’로 시작한다.
토굴로 들어가는 스님과 작별하는데 스님이 서예 몇 점을 내놓으며 하나를 권했다. 명나라 말의 문인 진계유가 쓴 ‘문 닫으니 여기가 깊은 산이요, 책을 읽으니 곳곳이 정토로구나’를 예서체로 쓴 작품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내심 선조 대의 문장가 송한필의 오언시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花開昨夜雨)/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네(花落今朝風)/가련하다, 한 해의 봄날이여(可憐一春事)/ 오고감이 비바람에 달렸구나(往來風雨中)’를 초서의 민활한 흥취로 쓴 작품에 마음이 끌렸다.
다음날 그 아쉬움을 말하는 저자에게 스님은 “피고 지는 꽃 연연하지 말고 비바람 탓하지 마소” 하며 ‘꽃 심으면 안 필까 걱정하고/꽃 피면 또 질까 걱정하네/피고 짐이 모두 시름겨우니/꽃 심는 즐거움 알지 못해라’는 고려 문인 이규보의 시를 살짝 들이민다. 그때야 저자는 ‘스님이 떠나도 새날이 오니 알겠다. 갈 것이 가고 올 것이 온다’는 것을 각성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고, 아무 때나 해라’며 청춘들에게 쓴 중간의 글에는 혜원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 '소년전홍'에 조선 기생 매창과 혜원, 당나라 두추랑의 시 ‘절화지'(折花枝)가 8페이지에 걸쳐 그토록 붉디 붉은 문장을 타고 촉촉히 흐른다. 그러니 메마른 나날이거든 꽃 피는 삶에 홀리어 보자.
◇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지음/오픈하우스/1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