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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14 00:59
[이기창의 사족]'사도법관' 김홍섭이 더욱 그리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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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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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창 뉴스1 편집위원>
“평생을 되돌아보니 내가 지은 죄가 참으로 많았다.” ‘사도법관’으로 불리던 김홍섭 판사(金洪燮·세례명 바오로)가 1965년 3월 만 쉰 살의 나이로 이승을 떠나며 남긴, 고뇌 짙은 고백이라고 한다. 그의 삶이 응축된 술회로 느껴진다. 해방공간에서 짧은 검사생활을 거쳐 20년 가까이 판사로서 죄지은 사람을 심판해온 자신 역시 허물 많은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고해(告解)였을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간암으로 투병하다 자택에서 선종(善終)했다.
사도법관이라는 호칭은 기독교와 불교를 두루 섭렵하고 가톨릭에 귀의한 그에게 고(故) 장면 전 총리가 붙여준 ‘명예훈장’이었다. 삶 또한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나 다름없었다. 그의 장인으로 이승만 정부시절, 법무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김준연(1895~1971)이 “스님 같은 사위”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1950, 60년대 한국이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을지라도, 판사라는 사회적 지위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특권과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청빈은 절로 몸에 밴 삶의 원칙이었다. 옷은 시장에서 헐값에 산 중고양복이 고작이었다. 구두는 언감생심, 고무신을 신었다. 점심은 판사실에서 홀로 단무지 반찬의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서울고등법원장 시절 관용지프는 청사에 세워두고 걸어서 출퇴근했다. 평생 그 흔한 접대 한번 받지 않았다. 전주지법원장 부임 뒤 기관장들이 요릿집에서 축하연을 마련하자 “어디서 이런 돈이 생겼느냐”고 나무라며 자리를 물리치기까지 했다.
김홍섭은 일제강점기 전북 김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1915년에 태어났다. 4년제 보통학교 졸업 때 최고영예인 도지사상을 탔지만 가정형편상 진학을 포기했다. 독학으로 중등학교과정을 마친 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본 도쿄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들어간다. 유학 1년 5개월 만인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4)는 나이를 떠나 김홍섭의 멘토이자 지음(知音)이었다. 가인의 사무실을 나눠 쓰며 힘없는 사람을 위해 변론에 힘쓰던 김홍섭은 해방 뒤 보신을 위해 법조인이 됐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법조계를 떠날 결심을 한다. ‘법조인에게는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기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는 평소의 회의 때문이었다. 주위의 만류로 주저앉았다. 45년 10월 그는 서울지검 검사로 발령난다.
김홍섭의 이름 석 자가 널리 알려진 계기는 이듬해 5월의 ‘조선정판사’사건 수사를 맡으면서부터였다. 조선공산당이 남한경제의 교란과 당비조달을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찍어낸 사건이다. 고비마다 미군정의 과도한 수사개입을 막아내던 그는 끝내 사표를 쓰고 뚝섬으로 물러나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를 판사로 부른 사람은 가인이었다. “앞으로 대법원장이 될 사람은 김홍섭뿐”이라고 기대하던 김병로를 고작 1년 뒤 김홍섭도 따라갔다.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 최종고는 저서 ‘사도법관 김홍섭 평전’(나비꿈)’에서 “그는 자연법사상에 충실하여 법보다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심을 중시했고, 민족보다는 인류의 공동체적 운명을 앞세웠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기초한 재판철학을 옹호했다”고 평한다.
타계 반세기가 지났지만 김홍섭은 여전히 법조계 안팎의 존경을 받는다. 청빈한 삶 못지않게 죄수들에 대한 마음가짐도 남달랐다.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지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이 사형을 선고한 사형수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박봉의 월급을 쪼개 가난한 죄수들을 돌보고 사형수들의 묘지를 사는 데 보탰다.
감사원장을 역임한 원로법조인 한승헌은 한 인터뷰에서 고인을 다음처럼 회고한다.(1961년 고인이 광주고법원장, 자신은 검사로 재직하던 당시 ‘경주호 납북사건 피의자’들의 재판 때였다.) “‘아무개 아무개를 사형에…’라고 극형을 선고하면서 재판장인 그는 목이 메었고 한참이나 머리를 숙여 묵념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생전에 시집과 수필집을 내기도 했던 김홍섭은 ‘별을 보는 마음’이라는 글에서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면서, 어찌 안 보이는 나라와 뭇사람을 사랑한다 하겠는가?”라고 스스로를 가다듬고 있다. 사상가의 일면이 보이는 내면의 글이다.
오래전 법조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조인으로 세 사람을 꼽았다. 첫째가 사법부의 독립을 지킨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둘째가 청렴과 양심의 상징 김홍섭이었다. ‘대쪽검사’로 이름난 최대교(1901~1992)가 세 번째였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들 3인을 ‘법조3성(法曹三聖)’이라 우러른다.
지금 우리사회는 ‘엘리트’로 불리던 전현직 법조인 3명의 파렴치한 행위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한다. 이들의 일탈로 법조계 전체가 거센 탁류에 휩싸였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신뢰가 생명인 법조계에서 검사장이나 부장판사 같은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냐는 지탄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지탄 속에는 과연 사회정의 실현의 보루로 법을 믿고 따라야 하냐는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이번에도 유야무야 끝날 경우 사법신뢰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나갈 판이다.
그러기에 사도법관 김홍섭이 더욱 그리운 오늘이다. 그의 삶은 청류(淸流) 그 자체였다. 청류란 명분과 절개를 지키는 깨끗한 선비를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이 기사는 ‘사도법관 김홍섭 평전’ 등을 토대로 작성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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