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목사(전 시애틀 한인장로교회 담임/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끝나지 않은 전쟁(암호쪽지 15-1)
15-1 암호쪽지
<동백야> 호프집은 초저녁부터 꽤 많은 손님들로 북적 댔다. 남자 신사로 변장한 경란은 9호 테이블에서 <동백야> 사장 이정재와 맥주를 마신다. 경란은 남자 신사로 변장하기 위해 변장 전문가를 고용하여 자신이 보아도 자신이 아닌 것 같이 변장을 했다.
김경란은 인민군 정보장교였고 남파간첩을 훈련시켰던 간첩중의 간첩이었던 인물이다. 이런 김경란이 여장으로 위장한 간첩 이영철을 속이려고 완벽하게 남장을 한 것이다.
“이 사장님이 이렇게 친히 테이블 접대까지 해 주셔서 감지덕지네요.”
경란이 변조한 남자 음성으로 사장 이정재에게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남장을 한 경란은 정말 너무 잘 생긴 미남이었다. 벌써 여러 번, 잊을 만하면 혼자 찾아와 맥주를 마시고 가는 남장 경란에 대한 호기심은 <동백야> 애기들 사이에 화제꺼리였다.
“사장님이 너무 잘 생기셔서 우리 애기들이 사장님 보고싶다구 야단이에요. 저두 그렇구요. 우리 건배해요.”쨍그렁 하고 두 잔이 부딪친다.
경란은 아주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주위를 살펴본다.
구석 쪽 3호 테이블에 이진호가 어떤 사람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이진호, 너 아직 분명하게 살아 있구나. 내가 너를 만나려 벌써 여기를 몇 번이나 왔는데, 너 이제 드디어 그 꼬리를 보이는구나.>
경란은 술값 위에 두둑한 팁을 보태어 돈을 테이블에 놓고 붙잡는 이정재 사장을 뒤로 하고 <동백야>를 빠져 나온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경란은 택시를 불러 택시에 오른다.
<이진호, 웬수, 개새끼. 내가 네 피를 경숙의 묘에 꼭 뿌릴거야--.>
<뭐, 위대한 수령님을 위해? 혁명 완수를 위해? 개수작 떠네. 그래 혁명 완수가 인민을 굶겨 죽이는 것이냐? 혁명? 개 아가리에나 넣어라.>
경란은 참으로 너무 많이 변질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해 보인다.
<220000번,“또 만나서”이진호 대좌, 네 운명은 여기까지다. 이진호--.>
경란은 아들 조진호 검사에게 이영철, 이진호 대좌의 은신처와 접선 번호를 다 가르쳐 주려고 핸드폰을 꺼낸다. 전화번호를 누른다. 303 062-- 경란은 번호 하나를 남겨놓고 길게 한숨을 쉰다.
<조 검사가 이진호의 친 아들인데---아들에게 그 아버지를 죽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것도 그 어미인 내가? 내가?>
<차라리 기억이 회복되지 말아야 하는 건데--.>
경란은 너무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려고 방안을 오락가락한다.
조진호 검사는 드디어, 마침내, 아주 오랜 동안 수사 끝에, 이영철의 꼬리를 밟는다. 0908이 경숙을 암살할 때 사용한 차를 찾았고 이 차안에서 이영철의 머리카락을 찾은 것이다.
DNA 분석 결과 이영철의 것과 동일하였다. 3 1절 아침 이 영철은 직접 자신이 운전하여 0908과 함께 미장원에 가는 경숙의 차를 미행하였고, 0908이 경숙을 암살할 때 주차장 밖 골목에 차를 대기했다가 0908을 태우고 도망을 쳤었다. 그래서 이 차 안에서 이영철의 머리카락이 떨어진 것이다.
조 검사는 온 수사력을 총 동원하여 이 차의 동선을 파악했고 청량리 <동백야>가 접선 지점인 것도 알아냈다.
<그래, 이 여우새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여기까지 온 조 검사에게 더 귀한 정보가 들어왔다. 이제는 남한 정보원이 된 남파간첩 접선번호 6776이 이번에는 다대포 앞 무장간첩 침투 사건보다 더 크고 귀한 정보를 가져왔다. 6776이 드디어 마침내 이영철과의 접선 암호를 알아낸 것이다.
<제가 구두를 파는 사람인 데요. 구두가 잘 안 어울리네요.> <나 그 구두 한 켤레 삽시다.>
조 검사가 십 수 년 동안 검거하려고 그렇게 온갖 노력을 다한 이영철을 마침내 만나게 된 것이다. 조 검사는 이영철과의 접선 지점과 접선 암호까지 알아냈다.
<이번에는 이영철 네 차례다.>
조 검사의 가슴이 흥분하여 뛰고 있다.
<흥분하지 말자. 주의해야 한다. 또 주의해야 한다.>
<동백야>에는 손님을 가장한 대공 수사팀 소속 남녀 형사들이 늘 배치되었고 다시 여자로 변장한 채, 때때로 <동백야>에 나와 3번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는 이영철을 감시한다.
이제 조검사는 그렇게도 잡으려했던 돼지를 찾았고 돼지우리도 알아냈고 돼지의 먹이 감도(암호) 알아낸 것이다. 조 검사는 <동백야> 부근의 모든 길목과 청량리 일대에 사복형사들을 겹겹이 배치했다. 당장 체포할 수 있지만 다른 간첩까지 더 잡으려고 디 데이를 하루하루 미룬다. 그러나 이영철이 만나는 사람들은 <동백야>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뿐이었다.
<너무 시간을 끌면 우리 꼬리가 보일 수 있다. 이제 D 데이를 정해야 한다.>
조 검사는 그러기 전 한 가지 모험을 더 한다. 조 검사는 이영철과 접선하여 이영철을 작전 지점으로 불러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동백야>에서 이영철을 체포한다면 이영철이 위급할 때 탈출하려고 <동백야> 어디에 어떤 함정, 어떤 장치를 준비해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의심스러운 것은 이영철이 앉는 테이블은 항상 3번 테이블이고 <동백야>에서 이 테이블은 다른 손님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이다. 이 3번 테이블이 비어 있을 때는 항상 <예약>의 팻말을 가져다 놓곤 했다.
<3번 테이블에 비밀이 있다. 위급할 때 밑으로 꺼지게 되어 있지는 않을까? 저 테이블 어디에 스위치가 있어 홀 안의 모든 전기를 한 번에 끄는 장치가 된 것은 아닐까? 저 테이블 어디에서 단추를 누르면 천정에서 독 개스가 나오지는 않을까. 3번 테이블 어디에 이 집을 몽땅 무너지게 할 수 있는 폭탄 장치에 연결 되는 어떤 스위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조 검사는 진호빌딩 505동에서 이영철을 체포하려 했다가 아래층 병원으로 연결된 비밀통로를 통해 이영철이 탈출함으로 그를 체포하는데 실패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접선 암호가 있으니까 일단 접선해 보아야 한다.>
조 검사가 보낸 정보원이 <동백야> 5번 테이블에 앉아 이영철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역시 여자로 변장한 이영철이 3번 테이블을 찾아 앉는다. 애기들에게 무엇을 주문한다. 맥주와 간단한 저녁 요리 접시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시 맥주 한잔이 더 나온다. 이영철은 천천히 맥주를 마신다.
여자 정보원이 3번 테이블로 가까이 간다. 이영철과 정보원의 눈이 마주친다. 가벼운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제가 구두를 파는 사람인 데요. 구두가 잘 안 어울리네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