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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2 23:45
[제8회 시애틀문학상 수상작-수필 우수상] 시든 꽃을 든 남자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001  

배수영


시든 꽃을 든 남자


결혼 초기에 우리 부부는 화원에 자주 다녔다. 남편은 화초에서부터 분재, 심지어 이끼까지 두루두루 관심이 많았다. 이끼도 돈을 받고 파는 식물이라는 결혼하고 나서 처음 나에게 화원은 신세계였다. 남편은 주말에도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분재와 정원 가꾸기에 대한 책을 빌려다 읽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화사한 봄날, 우리는 여느 주말과 다름 없이 동네 화원을 찾았다. 식물 기르기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풀이나 나무보다는 화려한 색을 뽐내는 꽃들만 보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의 향연을 보며 내가 탄성을 지르는 동안, 남편은 꽃들을 본체만체 하더니 엉뚱하게도 구석의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것이었다. 다 죽어가는 화초를 헐값에 파는 진열대였다. 이름이 무엇인지, 시들기 전 모습이 어땠는지 상상조차 안 가는 초라한 화초였다

그런 건 사서 뭐하냐는 내 타박에 그저 싱긋 웃더니, 결국 남편은 심사숙고 끝에 말라 비틀어진 화초 하나를 구입하고야 말았다.

그 날 이후 남편은, 퇴근 하자마자 옷도 갈아입기 전에 그 화초가 잘 있는지부터 살펴보고 물을 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애정과 관심을 듬뿍 주었지만, 화초는 한동안 별 차도가 없어 보였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남편이나 나나 육아전쟁을 치르느라 이 화초에 대해 잊어갈 때 즈음이었다

이파리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초록색이 한결 뚜렷해져 있었다.  언제 시들었었냐는 듯 줄기와 잎에 물이 올라 통통해졌다.

그 후에도 남편은 시든 화초를 몇 번 더 구입했다. 죽은 화초 살리기 프로젝트가 언제나 성공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오랜 시간에 걸쳐 들인 공이 차차 빛을 발하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단다.

또 어떤 날은, 분재를 해보겠다고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 화분에 심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나무의 크기가 줄어들면 매우 적은 양분과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 오래 살 수 있다나

멀쩡하게 잘 크고 있는 나무를 왜 굳이 자르고 깎아서 조그만 화분 안에 가두는지 나로선 이해가 안 가지만 말이다. 화분만 샀다 하면 얼마 못 가 죽이고야 마는 나는 그런 남편이 신기하기만 하다. 남편 말로는, 자신도 원래는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스스로를 가다듬으려고 일부러 분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식물 기르기는 육아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아이를 돌보고 치다꺼리하며 보내는 하루는 참 길게 느껴진다. 내 아이는 더디 자라는 것 같고 남의 아이는 금방 자라는 것 같다는 말도 있듯이, 단계마다 거쳐야 할 과정이 참 많은 게 육아다

하지만 늘 같은 모습인 것 같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커 있는 걸 보면 참 신기하고 기특하다

오늘 물을 준다고 내일 갑자기 꽃이 피거나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보살피다 보면 어느새 엄마아빠의 뭉친 어깨에 고사리 손으로 안마도 해 주는 게 아이들이다

이가 늦게 난다고 걱정했는데 어느새 활짝 웃으면 윗니 아랫니가 조로록 난 것이 보인다. 기는 게 늦다고 걱정했는데 어느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스스로 뿌듯해서 박수까지 친다

아무리 녹록하지 않은 일상에 피곤하고 눈이 감겨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를 보면 이 맛에 살지 싶다. 남편도 그 맛에 화초를 가꾸는 것이리라.

묘목을 심으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나무가 되기까지 몇 십 년 이상 걸린다. 남편은 미국에 온 첫 해에 심었던 단풍나무를 25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화분에 심어서 가지고 다녔다는 그 단풍나무는, 지금 우리 집 뒷마당에 고이 심겨져 촉촉하게 비를 맞고 있다

25세도 넘은 나무 치고는 아직도 일곱 살짜리 아이의 키 정도밖에 자라지 않았다. 아무리 인내심 있는 사람도 이쯤 되면 복창이 터지지 않을까 싶은데, 남편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찬찬히 진보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여유가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조급해하거나 쉽게 절망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한 발짝 떨어져서 큰 그림을 보고, 상황의 긍정적인 면을 나에게 일깨워준다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가 복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러는 거라고 한다. 되는 일 하나 없어서 낙심한 하루였다 해도, 교훈을 얻었다면 그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인 것이다.

오늘도 남편은 분재를 다듬는다며 소나무 가지에 일일이 철사를 감아 방향을 잡는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실루엣을 완성하기 위해 미용사처럼 가위를 들고 정성스레 잎사귀를 쳐낸다.

시든 꽃을 살리는 일처럼, 내 가정도, 내 꿈도, 밭 갈 듯 정성스레 찬찬히 일구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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