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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02 02:26
[시애틀 수필-안문자] 슬픈 토마토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135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슬픈 토마토


방울토마토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었다. 꽈리처럼 요리조리 굴리다가 살짝 깨문다.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비릿함이 입안에 가득 찬다

, 맛있어. 잘도 익었네.” 아이처럼 소리친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깻잎과 상추, 토마토 줄기가 다정하게 엉켜있다. 따면 또 돋아나는 깻잎과 상추도 대견하지만 다닥다닥 달려있는 토마토를 보면 참 신기하다. 착하기도 하지. 물만 주는데도 크고 작은 토마토와 방울토마토들이 빨갛게, 노랗게 익는다.

큰아버지네 토마토 밭은 어린 우리들에겐 운동장처럼 넓어 보였다. 평양의 큰아버지는 부자였다. 논과 밭이 많았고 창고엔 쌀과 잡곡들이 그득했다. 동네에서 존경받던 어르신이요, 장로였던 그분은 전도사였던 막내 동생 우리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셨다

반면 큰 어머니는 심술쟁이에 욕심이 많으셨다. 무엇보다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는 토마토를 우리들이 몰래 따먹을까봐 무서운 얼굴로 감시하곤 했다

동네의 꼬맹이들과 몰려다니다가 토마토 밭 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훠이훠이 새를 쫓듯, “인석들아 일년감(토마토의 우리말) 떨어진다. 데켄에(저쪽에) 가서 놀아라.”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나는 그때 토마토 맛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밭 가까이 가면 비릿하면서도 독특한 내음이 너무 짙어 어지러워지곤 했다.

어느 날, 큰아버지 집에 갔다. 조용하다. 계모 같은 큰어머니는 어디 가셨을까?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나는 엉거주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섰다. 방 한가운데서 가치다리를 하고 앉은 큰 아버지가 토마토 바구니를 놓고 입맛을 다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 문자가? 이 켄에 오라. 내 레 이것들이 얼마나 익었는디, 맛은 들었는디 먹어 보대서. 어서 들어오라.” 큰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끌어 앉히셨다. 불그스레 익은 커다란 토마토를 손에 쥐어주며 큰 에미 오기 전에 얼른 먹어라.” 큰아버지도 큰어머니의 심술을 알고 계셨나 보다. 부끄러워서 쩔쩔매던 꼬맹이의 가슴이 찌르르 해졌다

어서 먹기를 기다리며 환하게 웃으시던 큰아버지를 바라보며 와락,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비릿했던 그 맛! 지금도 생생하다. “맛있디?” 다정한 큰아버지의 얼굴이 가물가물 생각나지 않지만 환한 미소는 또렷하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와작와작 오물오물 먹다가 후후후, 웃었다

내가 토마토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아마 큰아버지와 나와의 비밀, 둘이서 사이좋게 먹었던 그때의 그 맛 때문이리라. , 큰아버지의 다정함처럼 따뜻하고 달콤했던 그 맛, 큰아버지의 땀 냄새처럼 비릿했던 그 냄새.

결혼 초에 우린 마포 아파트에 살았다. 직장이 비슷한 거리에 있던 남편과 나는 퇴근하면서 외식을 하고 집에 오는 일이 많았다

엄동설한, 나는 임신 중이었다. 어머니랑 남편이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묻곤 했다. 가을엔 김장을 위해 자라고 있던 무청이 달린 무가 먹고 싶었는데, 겨울이 오자 큰아버지랑 몰래 먹었던 그 토마토가 자꾸 떠올랐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와 남편이라도 한겨울 어디에서 토마토를 구할 것인가. 그런데 이게 웬일? 구했다. 밤마다 아파트 앞에서 작은 구루마 몇 대가 등불을 켜고 과일을 팔곤 했는데 거기 얼은 토마토가 있었다. 호텔 양식당에서 쓸 비닐하우스의 농사가 실패한 토마토일 게다.

볼품없이 푸르고 붉은 색이 제멋대로지만 제법 토마토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우리는 매일 얼음 박힌 토마토를 한 봉지씩 사곤 했다. 덜덜 떨면서 많이도 먹었다. 얼었어도 특유의 그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토마토의 맛은 옅게 지니고 있었다

일이 있어 늦게 들어 올 때도 토마토는 있었다. 착해 보이는 소년이 추워 발을 동동거리며 나를 위해 기다린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 하는 나를 보자 과일 팔던 옆의 아저씨가 딱한 얼굴로 알려준다. 아이의 어머니가 오늘내일 한다고 했는데 돌아 가셨나 보다고. , 그랬구나. 어쩐지 늘 풀이 죽어 보였어. 토마토 봉지를 내밀던 미소에 슬픔이 깔려 보이더니. 가슴이 철렁하며 콧등이 매웠었다. 걷어가는 소년의 발길이 끊기자 언 토마토는 아깝게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졌겠지. 더 이상 얼은 토마토는 먹을 수 없었다.

파랗게, 빨갛게, 노랗게 다닥다닥 달려있는 토마토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슬픈 토마토들을 떠올리게 한다. 큰아버지가 지주이면서 장로이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하셨다는 가슴 저리는 소식도 있었다. 아, 분단의 비극은 언제 끝나려는지.

토마토는 건강에 좋은 채소라고 떠들썩하다. 항암효과, 성인병 예방, 다이어트, 위를 튼튼하게, 피로회복, 그뿐인가, 남자들의 전립선에는 또 얼마나 좋다고. 익혀먹으면 효능은 3배, 식용과 함께 먹으면 효능이 10배라지.

빨갛고 노란 토마토를 내 작은 두 손에 담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무 것도 모르는 토마토는 나를 보고 방긋방긋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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