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지부 고문
삶과 기다림
식품점으로 가는 길엔 <일단정지> 팻말이 유난히
많다. 네거리 길목마다 꽂힌 팔각형의 <스톱>
사인 앞에선 일단 차를 멈춰야 한다.
때론 각 방향에서 네 대의 차가 한꺼번에 정지하면
아무리 급해도 바퀴가 멎은 차례대로 한 대씩 움직인다. 그 1분 남짓한
기다림으로 차의 물결은 원활해진다.
아침마다 꽃봉오리가 매달린 난을 보는 것이 요즘
내 생활의 즐거움이다. 작년에 들여 놓은 호접난은 두어
달 넘게 집안의 시선을 끌었는데, 어느 날 자주색 꽃 날개를 접고 맥없이 떨어지더니 멀쑥한 꽃대만 남았다.
꽃대의 세 번째 마디를 잘라주면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에 여러 차례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다. 조금씩 몸을 불리는 두 개의 꽃망울이 그 기운을
전해준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뿌리의 물기를 살피는 것이 고작이지만.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기다림을 갖는다. 기다린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는 첫 번째 과제이고 또 그 과정인 것 같다.
어머니의 끝없는 기다림은 마음의 고향처럼 우리의 가슴에 묻혀있다.
임신부는 무거운
몸을 견디며 소중한 아기의 출산을 기다린다. 아내는 출근한 남편의 귀가 시간을, 혼기의 남녀는 배우자가 나타나길, 부모는 반항적인 청소년기 자녀가 철들기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남녀는 만남의 약속 시간을 기다린다. 뿐이랴. 실직한 가장은 일자리를, 병든 몸은 회복을 기다린다. 이처럼 기다림은 늘 몸을 바꿔 가며 우리의 삶에 얽혀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다림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이 깨어나길 몇
해 째 기다리는 여인의 눈물겨움을 안다.
치술령 정상에 있는 망부석은 신라 눌지왕 때 왕제(王弟)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기다리던 아내가 끝내는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석공 아사달은 탑이 완공되기 전에는 아녀자를 만날 수 없다는 규율
때문에 지척에서 기다리는 아사녀를 만나지 못한다. 완성된 탑이 연못에 비취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는 해가
몇 번 바뀌어도 탑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자 지친 몸을 연못에 던진다. 석가탑이 무영탑(無影塔)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연유이다.
현대인들의 어긋난 심성 중에 하나가 조급증이다. 기다림이란 숙성과정이 거의 없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기다림은 낭비요 무기력함이요 지루하며 쓸모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문득 예수회의
사제 헨리 나우웬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 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
메마른 사막은 덥고 끝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사막인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기다리는 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흔히들 기다림을 수동적인 행위라고 한다. 행위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행위를 받는 입장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롱펠로우의 시각은 새겨볼 만하다.
“기다리는 것은 가장 공격적인 투자의 한 방법이다. 만사는 끈기 있게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온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따른다. 인내하지 않으면 내게 다가오는 것을 온전히 맞을 수 없다.
인내하지 않으면 뒤돌아서게 만든다. 여기서 자신의 적극성이 개입된다.
인내는 외부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행위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의 포용과 요구가 없다면 기다림은 이뤄질 수 없다. 기다림이란 적극적인 자신의 의지와 행동의
발현인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포용 혹은 요구로 인한 기다림은 설렘과 두근거림을 품게 하는 근거가 된다.
기다림은 내 마음과 의지가 개입된 적극적인 행위이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시절 종종 워싱턴 D.C. 뉴욕 에비뉴에 있는 교회에 출석했는데 그 교회의 조셉 목사는 어떤
기회에 링컨대통령의 낡은 성경을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한 페이지에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로 얼룩진 구절이 있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라’바로 시편 37편 7절이다. 위대한 일은 강인함이 아니라 인내와 기다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명언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는 링컨대통령은 기다림의 축복을 확신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울의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날을 사모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바울은
그저 삶의 한 지점에 멈춰 서서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을 향해 나아가는 소망의 여정이 자신의
인생임을 고백한다. 그 노정은 결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소망의
기다림으로 설렘의 여정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는 힘찬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 뒤마는 인간의
지혜는 단 두 단어‘기다림과 희망’으로 집약된다고 했나 보다.
나는 오늘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기다리며 인내로 살아가는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