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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1-04 17:02
[신년 수필-정동순] 다시 불을 지피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294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다시 불을 지피며


타닥타닥, 드디어 불길이 타오른다
벽난로의 문을 닫고 흡족한 마음으로 한 무릎 물러선다. 며칠째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이 구질구질한 날씨를 감히 어찌해 볼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 벽난로에 불을 때는 일이다

너무 성급하게 불을 피우려 덤벼들다간 집안에 매운 내만 가득 채우기 쉽다. 한 번 시도로 불이 지펴진 날은 기분이 좋다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 날엔 각 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거실로 모여든다. 난로 앞에 모여 책을 읽거나 체스를 둔다. 식구들이 좁은 거실에 모여 뒹구는 것이 좋다. 불을 조절하는 나는 뭔가 큰일을 하는 대장처럼 행동한다.

정원에서 가지치기한 나무들이 오늘의 땔감이다. 유순하게 불기를 빨아들이는 소나무가 불 마중을 한다. 잘 마른 잔가지를 넣어주면 불이 잘 붙는다. 소나무는 그 목질처럼 유순하게 탄다.

뜨거움도 거실에 골고루 퍼지게 한다. 화사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던 사과나무 가지들은 조용조용 탄다. 동백나무는 단단하지만 다른 나무들이 탈 때 같이 넣으면 적당히 어울려 타는 편이다

살아있을 때 잎사귀마저 가시로 무장한 호랑가시나무는 그 뼈도 단단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좀체로 불이 붙지 않는다. 가끔은 눈물을 쏙 빼놓게 하던가, 시커먼 그을음을 낸다. 마지막까지 성깔이 보통이 아니다. 다른 장작에 불길이 잘 붙었을 때 넣어 주어야 뒤탈이 없다. 나무가 각기 다른 목질을 가졌듯 탈 때도 자못 개성들이 있다.

살아서는 푸르고 아름답던 가지들이 이제 뼈로 남아 마지막 쓸모를 다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차례차례 탄다. 벽난로라는 제단에서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 이글거리는 불꽃,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노란 불꽃.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불꽃. 무어라 말해야 할까? 모든 것을 집중해야 타는 불꽃은 흡인력이 막강하다. 어느 쯤에선 그 기세가 두렵다.

너울거리는 불꽃 너머로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본다. 아이는 부지깽이를 들고 땔나무를 뒤적이고 있다. 솔가리 위에 화아 하고 덧 일어나는 노간주나무의 불꽃을 보며 그 맹렬한 기세에 도취해 밥이 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눈동자에 어리어 이글거리는 불꽃. 아이는 아궁이의 불길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액운을 다 태워 한 점 재로 변하여 허공으로 날아 흩어지는 소짓장. 타오르는 불길에서 소짓장을 사루는 어머니의 소망을 읽었던가?

혹은 인류에게 금지된 불을 훔쳐다 주었다는 프르메터우스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타오르는 불을 보며 잊혔던 유전자의 본능이 일깨워져 먼먼 원시의 조상들을 대면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둠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불, 불을 가진 인간을 동물들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냥한 고기를 익혀 먹게 되고, 동굴에서 추위를 피하던 벌거숭이들이 혹한의 땅에서도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불을 다룰 줄 알게 된 인간은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 단초를 제공한 프로메테우스는 쇠사슬에 묶여 간을 쪼이게 된 천형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나무가 타는 것은 사실 나무가 타는 것이 아니다. 열기에 의해 나무가 기체화되고 그 기체가 타는 것이니 탈화가 아닌가. 나무는 실체가 없어지지만, 사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육신이 혼신을 다해 집중해서 살아갈 때만 영혼이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불꽃을 보면 정신도 바짝 마른다.
우리들의 사고 체계에도 가끔 불을 지를 필요가 있겠다

벽난로에 불을 넣는 날은 집 안에 있는 종잇조각들도 태우며 잡념과 근심을 태우는 날이기도 하다. 제때 버리지 않는 습관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 같다. 은행에서 온 월별 보고서, 오래된 영수증,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 등 찾아보면 태울 것이 많기도 하다

벽난로에 불을 넣는 날은 작심하고 이런 것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잡다한 것을 태워 버리는 불꽃을 보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오래된 것을 비워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여지가생기지 싶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의식의 마무리는 감자를 구워내는 일이다. 주전자에선 찻물도 끓는다. 쿠킹 호일에 감자와 고구마를 싸서 잉걸에 던져 놓고 기다리는 동안, 작은 것이 주는 현실의 행복을 느낀다. 아이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감자가 익는 냄새를 맡는다

드디어 감자를 개봉한다. 맛있다, 로 시작된 대화는 끊기고 가족들이 감자를 먹는 소리만 들린다. 고구마를 베어 문 입안에 단맛이 가득하다. 뜨거운 고구마를 삼키며 다시 생각의 불을 지핀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우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 번뿐인 2017년을 이 노랫말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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