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숙 시인
내가 본 6ㆍ25
6월만 돌아오면 그 잔인했던 광경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고
먹먹해진다. 6ㆍ25동란이라는 한국전쟁이 한반도에 불어 닥쳐
말로 할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 그리고 내 눈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이었던 초등학교 때 겪었던 6ㆍ25 동란의 상처는 마치 내 마음의 한 켠을 파헤치고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6ㆍ25가
나기 전에는 그렇게 다정하고 씩씩하고 멋있었던 청년들이 가장 먼저 변했다. 인민군들에게 충성심을 보여주고
한 자리라도 얻어볼까 해서 동네 청년들이 군 소재지에 와 있던 인민군들을 찾아가 우리 동네로 초대했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1개 중대쯤 되는
인민군 무리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
이 동네 저 동네에 사는 청년들까지 몰려 들어 인민군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경사가 난 것처럼 음식을 만들어 인민군을 대접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이제부턴 우리가 주인”이라고 외치며 “살만한 세상이 왔다”고
좋아했다.
그런 와중에 인민군들이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고 존경 받던 분을 지주라는 죄명으로 양쪽 손을 뒤로
묶어놓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집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들과 소작을 짓던 사람들을 호명하며 그의 농토를 분배해줬다.
그리고 그 지주는 인민군에게 끌려갔는데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가족들은 그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인민군들은 가난했던 사람들을 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데 앞장세웠던 것이다. 그 무법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가족들이 무사했던 것은 나의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사는 분으로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안도를 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시에 자신보다 어린 젊은 사람과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항상 먼저 인사를 하며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 화를 면하셨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이 빨간 줄이 그어진 완장을 차고 인민군을 앞세우고 다니면서 조금만 거슬리거나
감정이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총살시켰다고 해서 우리 동네는 그야말로 공포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우리 옆 동네에서는 경찰 가족과 그 먼 친척까지도 반동으로 몰아 흙구덩이를 파놓고 그곳에 한꺼번에
몰아 넣고 흙으로 덮여 죽였다고도 했다.
한 마을에서 수 십 년을 아침 저녁으로 마주했던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잔인하게 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어렸지만 나는 6ㆍ25동란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를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도 억울한데 동란으로 형제와 이웃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이 비극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아픈 기억이 68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흘러서 현재까지도
정전상태로 남아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리다.
왜 그토록 긴 세월 동안 분단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을 생각해본다.
크리스천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이 난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을 탈출하며 40일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40년이
걸려 그것도 2세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불과 2~3시간이면 왕래할 수 있는 길을 68년 동안이나 서로 오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남북 양측 모두 회개하며 낮은 자세로 눈앞에 보이는 통일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