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그인 | 회원가입 | 2024-05-18 (토)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2021년 1월 시애틀N 사이트를 개편하였습니다. 열람하고 있는 사이트에서 2021년 이전 자료들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작성일 : 13-10-04 23:38
김윤선/필통이야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253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필통 이야기
 
미국으로 떠나는 내게 문우가 작은 필통 하나를 건넸다.
“언니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예쁜 한지의 포장을 벗기니 고풍스런 모양새는 물론이고 손 끝에 감도는 촉감이 좋다. 뿐이랴, 겉으로는 아닌 척, 속으로는 제가 가죽임을 내보이는 속감도 마음에 쏘옥 들었다

게다가 필통 안쪽에 “김윤선님께”라고 손수 궁서체로 곰상스럽게 날 불러주니 볼 때마다 손을 맞잡는 듯하다.

비싸 보이는 겉모양만큼 대우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값나가는 볼펜 두어 자루만 넣어 다니며 아꼈다. 과연 보는 사람마다 품위 있는 모양새를 칭찬해서 내 품위도 덩달아 올라가는 듯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게 어찌 품위뿐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함께 넣다 보니 공간이 부족했다. 뿐이랴, 좁은 핸드백 속에서도 제 품위만을 챙기는 바람에 핸드백의 모양새를 구기기도 했다. 참으로 융통성 없는 그대였다

게다가 필통 안쪽에 묻은 볼펜심 자국을 보노라면 공연히 격을 떨어뜨린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그나마 내게는 비싼 볼펜을 내밀고 써야 할 만큼의 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좁은 공간에도 잘 들이 앉아 제 몫을 다하는 천이나 합성재료로 만든 필통이 더 손쉬워 보였다. 품위 있는 필통은 점차로 내게서 멀어졌다.

제 품위만 믿고 뻗대다가 되레 외면당하는 게 이뿐일까, 그러고 보면 삶의 주관을 흩트리지 않고 산다는 것도 예사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그 필통은 내게 쓴 기억 하나를 남기게 했다

그런 기억에 남는 필통이 또 하나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산 첫 필통은 양철 필통이었다. 새로 샀을 때의 들떴던 마음과는 달리 등굣길에 가방 안에서 딸랑딸랑 내는 소리들이 왠지 궁상맞게 들렸다

주변에 친구들이 갖고 다니는 플라스틱 필통이 부러웠지만 어머닌 학년이 바뀌어야 사준다고 하셨다. 그때의 긴 기다림이란. 마침내 새로 산 빨간색 플라스틱 필통. 그런데 이를 어쩌나, 한 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플라스틱 필통은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필통이 교실 바닥에 떨어지기만 하면 어느 구석이 깨어져도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교내백일장 대회가 열렸다. 제목이 필통이었다. 교실 바닥에 떨어져서 볼품을 잃어가는 필통에 대한 불만과 새 필통에 대한 기다림에 대해 썼던 것 같다. 그런데 차상이었다. 2학년 꼬마가 한글도 서툰데 웬 횡재냐, 어쨌거나 마음의 상처는 때 아닌 행운을 불러와 그것을 말끔히 잊게 했다.

가죽 필통을 제 기능만으로 대우하기로 한 건 참 대견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끼고 어를 때는 그것의 쓰임이 적더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이외로 쓰임이 많아졌다

허름한 색색의 볼펜은 물론 지우개와 입술연지, 손톱깎이도 함께 넣었다. 필통은 어느 새 잡동사니 창고로 변했다. 자연히 필통을 여닫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자 몸놀림이 유연해지면서 품 또한 넓어 보였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걸 보는 듯했다

또 있다. 잦은 사용으로 모양새가 변형됐다고 여길 무렵 모서리가 닳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여태까지의 우아하고 귀한 모습보다 쓰잘데 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있는 지금의 바랜 모습이 더 살갑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련되고 고상한 삶보다 투박하지만 정직한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함께 들볶이는 게 훨씬 온전한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튼튼해서 깨어질 염려가 없는 양철 필통보다 깨어진 플라스틱 필통 때문에 쓸거리가 많았던 동심처럼 아픈 삶의 경험이 진정한 삶의 속내를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왔던 문우들이 필통 하나씩을 선물했다. 누빈 천으로 만든 필통이었다. 색색의 누빈 헝겊 사이로 필통이 아기자기하니 고국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순 한국산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모양새만 갖춘 가짜 한국산이란다. 한국산으로 둔갑한 가짜가 필통뿐 일까마는 정신을 담는 산물에까지 와 있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그러자 순간, 세상에 나도는 물건 속에 세상인심이 있다고 필통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마치 문인들의 위세를 가늠하는 것 같아서 공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주색 필통에 연필 몇 자루를 옮겼다. 그러자 가죽 필통도 숨통이 틔는 듯이 보인다. 그동안 내 편의만 생각했지 저들의 편의는 무시했다는 자책이 든다. 그러고 보니 세계가 한 지붕인 지금, 중국산이면 어떻고 한국산이면 어떠랴. 그로써 중국의 문향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또한 횡재가 아니랴.

필통을 열어 본다. 한결 넉넉해진 품 때문인지 연필도 어깨를 펴고 있다.

“한 건 건졌우나갈 준비할게.
연필이 채비를 서둔다.


 
 

Total 696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111 [수필-안문자]손맛대신 마음 맛으로 시애틀N 2013-11-02 5348
110 김영호 시인/가을 기도 (1) 시애틀N 2013-11-02 3366
109 공순해/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시애틀N 2013-11-02 3759
108 김학인/11월 단상斷想 (1) 시애틀N 2013-11-02 3313
107 김윤선/가을 그림자 시애틀N 2013-11-02 3152
106 제7회 시애틀 문학상 공모한다 시애틀N 2013-10-25 3372
105 엄경제/물망초 꽃 시애틀N 2013-10-28 3612
104 시애틀의 단풍나무 김영호 2013-10-21 3405
103 [이효경의 북리뷰]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시애틀N 2013-10-20 3629
102 임 풍/ 시인과 버스 기사 시애틀N 2013-10-16 3500
101 이대로/자랑스런 아빠(제9회 뿌리문학상 수필… 시애틀N 2013-10-16 3311
100 [이효경의 북리뷰] 김명호의『한글을 만든 원… 시애틀N 2013-10-10 3627
99 시애틀의 가을 김영호 2013-10-09 3100
98 [수필]꿈으로 칠해진 벽화-공순해 시애틀N 2013-10-04 3282
97 김윤선/필통이야기 시애틀N 2013-10-04 3255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About US I 사용자 이용 약관 I 개인 정보 보호 정책 I 광고 및 제휴 문의 I Contact Us

시애틀N

16825 48th Ave W #215 Lynnwood, WA 98037
TEL : 425-582-9795
Website : www.seattlen.com | E-mail : info@seattlen.com

COPYRIGHT © www.seattlen.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