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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1-02 21:28
김윤선/가을 그림자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150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가을 그림자

 
 
낙엽 쓸기

모처럼 얼굴 내민 햇빛 때문인지 흙이 제법 포실하다. 낙엽들은 담 밑에서 굼뜬 엉덩이만 비비대고 있을 뿐,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까짓 비에 제 무게도 이기지 못하는 꼴이라니. 오늘은 낙엽부터 쓸어야겠다. 작년엔 게으름을 부리다가 낙엽 밑에서 자란 이끼들만 기승을 부리게 하지 않았던가.

장갑을 끼고 마당에 내려섰다. 저쯤, 옹송크리고 있는 낙엽더미에 비질을 했다. 뭉텅뭉텅 쓸려나오는 물기 젖은 낙엽들, 의외로 풋풋한 생기가 돈다. 낙엽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묘한 생명감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모른 체 쓸어 모으니 금방 수북하다.

쌍둥이들 같다. 얼굴 모양도, 피부 색깔도 서로 빼닮았다. 한 나무에서 자라 저들끼리 모인 탓인지 잠시 소풍이라도 나온 듯 태평스럽다. 손으로 쓸어 담는 낙엽더미의 촉감이 좋다. 폭신하면서도 가벼운 느낌, 이제 막 꾸민 목화 솜이불 같다. 흘러 넘치도록 한 팔 가득 쓸어안아 쓰레기통에 붓는다. 주황색 같기도 하고 연한 갈색 같기도 한 낙엽들이 강물을 이룬다

누가 이들에게 생명을 잃었다고 했던가. 희희낙락, 그들의 얼굴에서 자유가 보인다. 어미의 손에서 홀연히 놓여난 봇물 터진 자유 말이다.
 
가을 낙화  

바람 한 줄기 지나니 나무 이파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흩날린다. 나붓나붓, 천연스럽게 내려오는 놈도 있고, 번지 점프를 하듯 툭! 내려앉는 성질 급한 놈도 있다

열 손가락 크기가 다 다르듯 그들의 성정 또한 그런가 보다. 파란 캔버스에서 나붓거리는 색 바랜 꽃송이들, 낙화다. 공연히 가슴이 시리다. 하릴없는 저들의 모습이 이루지 못한 꿈의 파편마냥 허허롭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여름 내내 바싹 말라있던 잔디밭이 그 새 초록색으로 변해 있다. 가을비 때문인가 보다. 비우고 채우는 자연의 신비, 단풍의 빈자리에 들어앉은 잔디의 초록색이 눈에 띈다.

나는 슬며시 쓸어 모은 낙엽 한 움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쓸어낸 잔디밭 한가운데로 획 뿌렸다.

“가을마당엔 낙엽이 몇 뒹굴어야 제 맛이니라.

나는 지금, 잘 비질된 절 마당에 낙엽을 한 움큼 흩뿌리고 표표히 사라진 원효를 흉내 내고 있다.
 

가을 햇빛

모처럼 해가 났다. 음침하고 슬픈 표정이던 회색 세상이 이토록 해맑은 얼굴들이었나 싶어 새삼스럽다. 아침엔 햇빛이 동쪽 창으로 들어와 집안을 밝히더니 점심때가 지나고 슬금슬금 들어온 햇빛은 서쪽 거실 마루에 눌러앉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릴 때 용케 아랫목을 차지하고 나면 좀체 엉덩이를 떼고 싶지 않던 나른함처럼. 오랜만에 찾아든 햇빛에 마루는 반들반들 윤기를 드러내고 있다. 둘은 뜻밖의 해후를 반기듯 포옹하더니 마침내 살을 맞대고 함께 졸고 있다. 그것을 훔쳐보며 피식 웃음을 날렸는데 나 또한 그런 나른함에 빠져 깜박 졸음에 빠졌다.
 
가을 소리

가을엔 한 자나 높아진 하늘 사이로 소리가 넘나든다. 거리를 쓸고 다니는 바람소리와 수확이 끝난 빈들에서 들리는 내밀한 소리들,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과 버리고 떠날 줄 아는 여유로움이 내 안의 소리를 듣게 한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 가을은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계절이다.
 

가을 뜨락

마켓에서 배추 한 상자, 무 한 상자, 그리고 단감 한 봉지를 샀다. 함께 싣고 오는 뿌듯함에 무겁지도 않았다. 나눌 것이 많은 계절, 그래서인지 가을은 그 속에 서있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내 삶에서 가장 살림이 빈한했고, 가장 마음이 가난했던 시절이 이 가을 속에서 되살아나 날 살찌우고 있다. 세상을 향해 터뜨린 분노와 주눅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고, 성숙하고 관대한 사람의 모습을 가릴 줄 알게 하며, 무엇보다 세상의 공짜 없음을 알게 한다.

가을의 끝물이다. 결실을 이룬 열매들은 다 자리를 떠났고, 빈 밭엔 바람만 괴어 있다. 풋것들의 빈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는 빈 땅의 넉넉함이 보인다. 가을을 보내는 게 우리 집 뒤뜰 뿐일까, 가벼워지는 달력 속에서도 가는 가을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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