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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7-14 00:27
김윤선/길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780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희끗희끗, 그림 속의 길은 몸을 사리고 지날 만큼의 오솔길이다. 양 옆으론 곧게 뻗은 잘 생긴 나무들과 드문드문 키 작은 나무들이 보인다. 부러져 나자빠진 나무 등걸도 보인다.

울창한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산들거리는 산바람에 잡초들이 살랑댄다. 바람은 내게도 풀내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꼬불꼬불 이어지던 길이 저쯤에서 사라지고 있다. 산 아래로 내려간 것인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길은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저런 산길을 걸은 적이 있다. 아파트 단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던 산, 부산에서는 가장 고도가 높은 금정산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산에 올랐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지 땅이 반들반들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만이 아는 오솔길이 있었다. 푸석푸석 낙엽이 밟히고 탄력 있는 흙이 이어지는 길이었다그 길에 들어서면 기운이 났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등에는 땀이 흘렀지만 발걸음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했다

맑은 물소리와 새소리는 물론, 다람쥐나 풀벌레가 재빨리 몸을 숨기는 소리도 들렸다. 이슬 품은 풀잎에 찾아 든 영롱한 햇빛을 만나면 은밀한 생명의 소리가 들렸으니, 욕심도 거짓도 없는 자연의 품에서 내밀한 나 자신을 만나는 길이기도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도 부려보고 축지법을 쓰듯 단숨에 뛰어내려오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 이르면 두 갈래 길을 만났다. 한 길은 산에서 동네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공동묘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으슥한 기분이 들어 나는 늘 같은 길로만 오갔다

그런데 요즘 부쩍 그 길이 궁금하다. 과연 그랬을까. 묘는 몇 기나 있었고 누구의 묘였을까. 남의 얘기만 듣고 저 먼저 발길을 끊어버린 길, 그 길이 내게 갈증을 일게 한다.

가지 않은 길이 그 뿐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꿈을 어느 만큼이나 이루었나 싶으면 자책이 인다. 늘 생활에 바빴고, 내 차례까지 오지 않는 경제적, 정신적 여유도 한 몫을 했지만 실은 온전히 내 책임이었다. 불쑥불쑥 마음만 키웠을 뿐, 실지 노력을 하지 않았다. 세심한 계획도 없었고 사전 정보도 모자랐다.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스스로 포기했다.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는데 스스로 변명하고 합리화했으며 용기가 부족했다.

그림 속의 길은 그 끝을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람 사는 길 또한 끝을 가늠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쩜 그건 아는 사람만이 찾아낸 오솔길처럼,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더 많은 호기심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 길이 끝을 보이지 않는 이유다.

친구들과 무주에서 덕유산을 넘어 창녕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길을 나선 적이 있다. 지도가 우리의 가이드였다. 한 친구가 앞장을 섰고 우리는 용기 백 배, 젊음을 앞세웠다

그런데 네댓 시간을 걷고 나자 길이 사라졌다. 옆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내려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의 정상에 오른다는 게 친구의 이론이었다. 날씨는 무더웠고 우리는 지쳐갔다. 의논 끝에 길을 되돌아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길도 쉽지 않았다. 수풀을 헤치고 다녔던 지라 길 찾기가 쉽지 않았던 때문이다. 모두 지쳤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때의 결정에 대해 어느 편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의 길에서 때로는 되돌아 나와야 할 때가 있음을, 그리고 돌아 나오는 길 또한 반드시 쉬운 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때 함께 배웠다

세상의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돌아 나오는 길에서 더 많이 좌절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그리고 길을 걸을 땐 무작정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때 배웠다. 어느 한 지점에 눈을 맞춰 놓는 일, 삶의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길도 종류가 다양하다. 신작로와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고속도로가 있고, 갓길과 샛길이 있다. 모두 나름의 쓰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샛길에 접어들었다가 때 아닌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고속도로에서 속도위반으로 단속을 당하는 걸 보면 길에 숨겨진 복병을 알게 한다

인간사 복병 없는 길을 어찌 바랄까마는, 길을 걷는 자의 몫이라는 걸 왜 이제야 아는 것일까.
사람의 표정에서 읽는 길도 재미있다. 생글거리는 표정을 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삶의 길이 아름다워 보이고, 시무룩한 표정이거나 삐죽하니 빈정대는 표정을 담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의 지친 삶을 짐작케 한다. 얼굴 표정이 말해주는 삶은 거짓이 없다

그런데 포장이 잘된 길만 걸은 사람에겐 왠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디마디, 삶의 폭을 넓혀줄 질곡이 없는 사람에게서 무슨 사람 냄새가 날까. 동네의 좁은 골목길이 꼭 구차하지만은 않은 이유다.

이래저래 상념에 젖어 있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쯤 하산을 서둘러야겠다.
액자 그림에서 눈을 뗀다.


감사 13-07-15 07:32
답변 삭제  
삶의 길은 참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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