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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03 10:52
공순해/지고이네르바이젠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622  

공순해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지고이네르바이젠
 
어느 핸가, 새해 첫 날였다. 마당에서 화창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자니 시궁창의 개스처럼 우울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또 한 해가 간 거라고? 그래 첫 날이라고? 흐르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인간 맘대로 재단해서 첫 날이라고? 오늘에 묶여 꼼짝 못하는 게 인간인 주제에? 나이 들수록 새해 오는 게 달갑지 않았다

한계 설정에 부딪쳤다고나 할까, 서머셋 모옴 말대로 '인간의 굴레'에 묶였다고나 할까.
지나간 많은 새해 첫 날들 중에도 이런 기분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 날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새로운 마음 자세를 갖도록 노력은 했다

한데 그 핸 왠지 맘껏 망가지자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그때 문득 한국 여류시인들의 대모라 일컬어지는K시인이 떠올랐다.

그 분은 대학 때,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타대학 친구들의 스승였다. 워낙 유명한 분였다그래 그런 분을 스승으로 모신 친구들이 슬쩍 부러웠고, 그 분 강의가 꼭 듣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분은 작품 쓸 때면 창문 커튼을 꼭꼭 닫아 어두운 조명을 만든 뒤,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듣는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푸하하하 웃고 말았다. 그건 시를 짜내는 거잖아. 샘물이 고이는 것처럼 마음에 고인 것을 길어 올려야 그게 진짜 시지, 짜내는 건 가짜잖아.

가장된 우울로 쓰여진 가짜 시. 그 후로 나는 그 분을 우습게 알게 됐고, 지고이네르바이젠도 우스운 음악으로 생각하게 됐다

한데 그 날 왜 하필 그 분 생각이 났을까? 나도 짐짓 가장된 우울을 과시하여 새해 첫 날 시간에게 응석을 부려 보고 싶었던 걸까?

얼른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검색해봤다

비 내리며 바람 부는 가을날처럼 쓸쓸하게, 달빛 쏟아지듯 감미롭게, 우울한 마음 바닥을 긁어 줄 바이올린의 음들을 기대하며. 많은 연주자들의 이름이 창에 우르르 떠올랐다

어떤 연주가 우울을 잔뜩 비벼, 슬픈 비빔밥을 만들어 줄 것인가. 골똘히 찾다 보니 제임스 라스트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라스트? 재미있는 라스트 네임이네.  

클릭과 동시에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한데, 이게 뭐지? 고색창연한 연주자들은 어디 가고, 캐주얼 복장의 연주자들이 흥겹게 몸을 흔들며, 감정을 실어 음을 살려 내고 있었다

우울은 야간 경기장의 백구(白球)처럼 뻥 쳐내고, 기쁨에 가득 찬 모습. 쓸쓸해서 아픈 기본 정조(情調)는 그대로였지만 연주자들이 흥겨우니 청중도 함께 몸을 흔들며 손뼉 장단으로 모두 연주에 참여하여 선율을 즐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축제 한마당이었다. 배반 당한 기대. 그러나 배반 당했어도 좋았다.

나는 가족 모두 불러 그 흥겨움을 함께 즐겼다. 새해 첫날 기분이 이 정도는 돼야지, ! 너스레를 떨며. 지옥에서 천국으로 승천한 기분였다. 그리고 큰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똑 같은 음 체계를 갖고도 우울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천국으로 안내하듯 행복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연주자도 있구나

순식간에 드러난 두 갈래의 길. 이건 순전히 발상의 전환 때문이었다. 소위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그 후로 나는 제임스 라스트의 팝 오케스트라를 사랑하게 됐다. 다른 시각으로 생을 바라 보도록 노력하게 됐다. 그리고 조작된 우울로 영혼을 쥐어 짜내어, 가화(假花)를 만들어 내던 그 시인도 용서(?)하게 됐다. 시간의 힘이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자천 타천, 시대의 논객 중 하나인 진중권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주장한다. 환경의 변화로 새로운 세대는 문자적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적 사유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젠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상상력이 힘이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다. 미래의 윤리학도 상상력이 될 터이다. 바꿔 말해, 미래엔 발상을 전환하지 않는 한 삶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 맹하(孟夏)에 엄동(嚴冬)을 생각해 본다. 이제 이 해도 중반을 넘겼다. 곧 가을이 내리면, 겨울의 눈 쌓인 언덕을 내려가야 하리라

새해 첫날 이루고자 소망했던 것들도 소실점을 향하여 사라지게 되리라. 그때 우리는 또 무엇을 꿈꾸고 있을 것인가. 온 길을 돌아봐 그 중간 점검을 해야 할 이 시간.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다시 발상의 전환을 꾀하려 한다. 공허하고 어두운 내 안에 빛이 가득 쌓이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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