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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03 10:34
정동순/쓰담쓰담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560  

정동순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쓰담쓰담

 
엄마, 또 두드러기가 났어.”

한여름의 더위가 계속될 때, 나는 가끔씩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로 고생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측간 앞으로 데리고 가서 등을 동쪽으로 돌리라고 하셨다.

측간 할매, 아이 두드러기 다 가져가 주소.”

엄마는 수수를 털고 난 수수 머리로 만든 빗자루로 살살 등을 쓸어 주셨다. 수수 빗자루의 솔기들이 피부를 스치면 금세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엄마가 몇 번 빗자루로 등을 쓸어 주고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며 더 이상 가렵지 않았다.

선풍기도 없었던 시골의 더위에 땀띠로 범벅되었던 일상도 밤이 되면 차분해졌다. 쑥이랑 생풀이랑 넣고 모깃불을 피운 마당엔 적당히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가족 모두 대나무를 엮어 짠 평상에 앉으면, 느릿느릿 부채질에 모락모락 옛이야기도 피어올랐다.

그때는 왜 그렇게 먹을 것이 없었는지 몰라. 나무껍질도 벗겨 먹고 나물 캐서 먹고 살았어. 전쟁이 난 뒤에는 쑥도 없었어. 한번은 쑥이 수북이 있어 좋아서 달려가 보니,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뼈가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부지깽이로 모깃불을 뒤집어야 할 때쯤이면 말씀을 잘 안 하시는 아버지도 이야기를 거들었다.

그날은 내가 여낭굴서 일하다가 깜깜해서야 풀 한 짐을 지고 내려왔는데, 거시기 각시보 있는 데를 지나는데, 바위에 뭔 허연 것이 앉아 있어.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더라니까. 똥이 빠져라 내달았지. 혼이 나갈 뻔 했어.”

여기 부채질 좀 해봐라. 아따, 시원하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면, 찐 감자와 옥수수를 간식으로 먹었다. 운이 좋으면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눕는 호강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부채질하며 어깨며 등도 살살 쓸어 주셨다

농사일로 투박해진 손이지만 등을 스치는 느낌은 참으로 기분 좋았다. 엄마의 시큼한 땀 냄새도 무작정 좋았다.

쏟아질 듯 총총한 별이 수놓은 여름밤이 이슥해지면 은하수는 검푸른 하늘에 펼쳐놓은 비단처럼 아스라이 흐르고, 우리는 견우별, 직녀별을 찾았다. 저기 저 별은 무슨 별일까? 간혹 별똥별이 긴 꼬리를 흔들며 밤하늘을 스쳤다. 그러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는 분명히 마당에서 잠들었는데 아침에 깨어 보면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 평화로운 기억 때문인지 나는 유난히 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그 자체가 칭찬이고, 격려이며, 무언의 애정 표시다.

유모차가 대세인 미국에서 나는 아이들을 업어 키웠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포대기로 아이를 업어 키우면 다리 모양이 휜다는 말에도 꿋꿋하게 포대기를 고집했다. 업힌 아이의 체온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행복했고, 아이도 내 체온을 느끼며 세상에서 제일 평화로울 것이라 믿었다. 칭얼대던 아이가 등에 업히면 쉽게 잠이 들었던 것도 이런 정서적 안정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지난 일 년,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 만날 때마다 투닥거렸다. 아이 방은 정리해 준 지 하루가 안 되어 옷이 모두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식욕이 왕성해진 아이는 간식도 많이 찾았다

그런데 반쯤 먹다 남은 과자봉지가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고, 음료수 병이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기도 했다
갈수록 자신의 주변 정리를 더 못하는 아이의 행동이 기막혔다

한번 시작하게 된 잔소리는 되돌아오는 말대꾸에 창문 밖까지 소리가 넘치며 끝나기 십상이었다.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이 싫은 아이는 같이 텔레비전을 보자는 내 청도 매몰차게 거절하곤 했다. 소파에 앉아 어깨에 팔을 얹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을 뿐인데.

이렇듯 자꾸만 티격태격하게 된 사춘기 아들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오가며 아이를 한 번씩 꼭 안아주는 것이었다. 야단치고 싶을 때도 일단 안아주었다

아들! 저거 일부러 저기 둔 거야? 저기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드물어졌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아기, 멍멍 개야 짖지 마라, 꼬꼬 닭아 우지 마라. 우리 아기 잠을 잔다, 자장자장자장.”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어부바도 많이 해 주고, 매일 자장가를 불러 주면서 쓰담쓰담을 해주곤 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관계가 엇박자를 내기 시작한 것은 신체 접촉이 드물어진 시기와 일치한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를 안아 준다든지 볼에 뽀뽀해 준다든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이 드물어졌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그토록 많이 눈 맞추고, 안아주고,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던 기억을 나는 어느 시점에서 잊어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그걸 깨달았다.

앞으로도 아이 때문에 화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야단치기 전에 먼저 꼭 안아 주리라. 훗날, 아이가 세상의 풍파에 두드러기가 나서 견딜 수 없게 가려워져 날 찾아오면 아무 말없이 우선 등부터 쓸어주겠다

수수비로 살살 등을 쓸어주던 어머니의 주문에 두드러기도 금방 괜찮아졌던 것처럼 아이도 평온한 마음을 회복할 것을 믿는다.

아이가 늦은 시각까지 안 자고 있다. 아직도 내가 다가가면 먼저 경계부터 하는 아이에게 이제 자야지하고 이마에 뽀뽀해 준다. 아이는 더위에 잠이 안 오는지 어쩐지, 불을 끄고 돌아서는 나를 부른다.

엄마, 쓰담쓰담 해줘.”

쓰담쓰담. 자장자장과 더불어 내가 아들에게 가르쳐 준 제일 사랑스런 모국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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