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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03 10:46
김윤선/그 해 여름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499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그 해 여름
 
세 아이가 있었다. 아이라고는 하나 이미 혼기에 이를 대로 이른 처녀들이었다
그 해 겨울에 한 아이가 결혼 날짜를 잡아둔 터라 의기투합, 처녀 고별여행을 하기로 했다
말만한 처녀들이 웬 여행이냐며 윽박지르는 엄마들에게 서로의 이름을 팔며 마침내 약속 날짜를 정했다.

그 와중에 한 아이가 엄마 몰래 애인이라는 녀석을 만나고 올 참으로 서울에 들렀다가 여행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시간과 장소는 오후5, 송광사 매표소 앞이었다. 아는 건 버스 시간표뿐, 달리 알음이 없었다.

하기휴가의 절정이 지났다고는 하나, 여름의 한복판이어서 여전히 휴가의 행렬이 길었다. 때문에 계획은 어긋날 대로 어긋나서 예정 시각보다 무려 세 시간이 더 지나고야 송광사 입구에 도착했다. 8월의 긴 낮이 지나고 이미 밤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둘이 부리나케 산으로 치달았다. 산속에서 아이가 오도카니 앉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데 차멀미에 시달린 발걸음이 무거웠다. 절 입구의 선물가게마다 이미 알 전등이 켜져 있었고, 가게에 딸린 방 하나씩을 빌린 젊은 패거리들로 절 주변은 한껏 여름을 타고 있었다. 민박이라는 말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처이들요, 혹 친구 만네로 가나?
“예.
“따라 온나,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척 보니 산으로 치닫는 바쁜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다며 웬 여인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부산 분이란다

타향에선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더니 꼭 그랬다. 늙수그레한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들어가니 부엌 안쪽 골방,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후딱 방문을 연 아이의 얼굴에 초조함과 반가움으로 눈물이 다 어렸다.

“이 문둥아, 그래도 용케 만났네.

갈 때의 들뜬 태도와는 달리 아이의 어깨가 한 자나 축 처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쌍방 애인이 아니라 짝사랑 애인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아이는 실연의 아픔만 안고 터덜터덜 내려왔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 첫날, 사람의 진가를 볼 줄 모르는 녀석, 그런 녀석들을 모조리 끌어내서 밤 내내 안주로 삼았던 듯싶다

그날 밤, 세 아이는 결혼의 당위성에 함몰되어 가는 세상의 편견에 항의하면서 열변을 토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실은 그 내용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쓰잘데 없는 후회와 한탄, 그리고 그 무렵의 사랑과 헤어짐, 뭐 그런 얘기들이었으리라.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마친 조카가 시애틀에 들렀다
호랑이 외할머니를 피해 누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어수룩하던 아이가 천장에 닿을 듯이 훌쩍 커버려, 제가 성일입니다, 하지 않으면 길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겠다

겨드랑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누나를 동생 안아주듯 폭 안는다. 누나는 고개를 들어 동생을 올려다보고, 동생은 누나를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는다.

라스배가스로, 로스앤젤레스로 일정을 설명하는 아이의 얼굴엔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뿐, 두려움이라곤 전혀 없다

숙소를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조카는 이미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두었다면서 되레 날 다독인다. 한국에 있는 제 부모와 통화를 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와도 일정을 조율한 후 아이는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든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튿날, 아이는 아침 일찍 서둘러 시내 관광을 위한 행장을 꾸리고 나섰다. 그새 인터넷 세상에서 버스 노선과 시간을 알아낸 모양이다. 주인보다 더 주인인 듯, 스스럼없는 태도가 대견하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는 것일까. 그러다가 아차, 그건 용기라기보다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젊음, 그것에 불을 댕긴 여름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우리는 선암사와 송광사, 화엄사와 쌍계사 일대를 돌았는데, 화엄사에서는 무슨 인연이었던지 스님에게서 글 한 점씩을 얻는 횡재를 누렸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확연히 달라지는 사투리와 자연의 모습에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고, 삶의 용기가 살아나면서 모험심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뙤약볕만 가득한 시골의 간이주차장에서 제 시간을 지키지 않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던 따분함마저 삶의 한 부분임을 이해하게 된 것도 그 해 여름이 준 선물이었다

지금 같으면 언감생심, 아무리 가자고 끌어도 주저앉을 8, 그 복더위의 계절에, 세 아이 또한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는 젊음이 여름의 유혹에 홀린 때문이었을까

피서(避暑)가 아니라 폭염(暴炎) 속으로 자청해서 걸어 들어간 걸 보면 젊음과 여름은 어떤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지. 따지고 보면 비등점이 높은 젊음의 뜨거운 피를 부추기기에 여름만큼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핸드폰도 없던 시절, 아는 곳이라곤 오직 송광사 매표소뿐, 무모했던 우리의 약속 또한 젊은 시절의 한여름에나 있음직한 객기가 아니었는지.

세 아이에게 오늘까지 친구 목록 제일 앞자리에 서로의 이름을 얹는 수확을 준 계절, 그 해 여름이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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