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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3 12:56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뿌리 내리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713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뿌리 내리기

 
새 자리를 잡아준 수국이 낯가림을 하는 것 같다. 몸집이 큰 만큼 뿌리도 깊었던 녀석인지라 때아닌 자리바꿈에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긴 했다.

부지런히 물을 주며 돌보았지만 녀석은 마치 풍토병에 걸린 듯 시름시름 앓고 있다. 무성하던 초록 잎사귀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새로 나오는 잎마저 끝이 까맣게 말려들어간다.

구석진 곳에 홀로 서있는 게 외로워 보여서 친구들 옆으로 옮겨준 것이 오히려 탈이 되었을까. 녀석들의 텃새가 있었을까. 조경을 한답시고 녀석을 위하는 척했던 알량한 선심이 오히려 녀석을 힘들게 했지 싶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녀석의 튼실한 뿌리를 믿으며, 뿌리가 잘 내리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비 오는 날, 잎에 머물다가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이 녀석의 눈물 같다. 한 사내가 떠오른다. 과테말라에서 온 이민자, 그는 늘 혼자였다. 나무껍질같이 거칠고 딱딱한 그의 손에는 하얀 반창고 대신 공업용 회색 테이프가 감겨 있곤 했다

어느 날은 한쪽 눈에 퍼런 멍이 든 모습으로 나타나 어색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웃을 때 드러나는 커다랗고 누런 앞니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쓸쓸함을 더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그와 스페니쉬라고는 겨우 인사말 몇 마디 아는 내가 의사소통을 하는 걸 보며 남편은 매우 신통하게 여겼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을 읽으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웃음은 물론 안타까움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염려가 되고 늦게라도 나타나면 안심이 되었다. 그는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가게를 돌아보던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진열대 사이의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토해냈다. 너무 뜻밖의 상황이라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깊고 서러운 눈물이 차가운 바닥으로 쏟아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라도 받은 걸까.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으면 아무런 위로도 될 수 없는 여기에 와서 저렇게 울고 있을까. 그가 마음껏 울 수 있는 곳이라고 여기고 우리에게로 왔다면 실컷 울도록 놔두어야 한다.’ 

그의 울음이 계속되는 동안 나의 생각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울던 그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 한번 마주칠 틈도 주지 않고, 물 한잔 건네줄 틈도 없이. 나는 그저 짙은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울음소리가 후비고 간 가슴언저리에 밤기운이 시리게 밀려들었다.

검게 그을린 사내의 얼굴에 흐르던 굵은 눈물이 말라가는 수국의 잎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야 해. 살아야지.”

수국을 향해 외쳤다. 그것은 외롭고 구석진 곳에서 아픈 가슴을 수없이 달래야 했을 그 사내와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그늘 속의 이민자들을 향한 외침이었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는 나를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봄은 작고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차가운 땅 기운을 뚫고 올라온 새싹들이 푸른 숨결을 뿜어내면 추위가 슬그머니 긴 자락을 거두어들이고 연초록의 봄이 가지마다 피어오른다. 마음이 쓰였던 수국의 가지에도 새 눈이 맺히더니 작은 잎들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제 수국은 푸른 잎을 무성히 달고 그 위에 꽃송이들을 피워낼 것이다. 긴 가지 끝에서 작은 꽃들이 오밀조밀 모여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꽃송이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모습 같다

가까이 보면 작은 꽃 하나마다 크기가 다르고, 피고 지는 시기도 각기 다르지만 함께 이루는 큰 송이는 풍성하고 아름답다. 수국은 꽃이 시들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잘라내지 않으면 앙상한 모습 그대로 겨울을 이겨낸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서 오랜 추위와 맞서며 마침내 봄을 맞이하는 수국 앞에서, 나는 약해진 무릎을 곧추세운다.

메말랐던 내 안에도 물이 오르는 것 같다. 늘 차갑던 손과 발에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굳고 차가운 땅을 향해 힘겹게 뻗어 가던 뿌리가 마침내 물줄기를 만난 모양이다.

수국에게 눈을 맞춘다. 울음을 토하던 사내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그의 어깨에도 지금쯤 환하고 따사로운 봄볕이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수국의 가지 끝에 하늘이 파랗게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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