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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4 13:13
[시애틀 수필-공순해] ALL 7777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587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ALL 7777

 
얼마 전 간단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여담으로 중고등학생 아이 둘 가진 엄마가 말했다. 오늘은 아이들 하교에 맞춰 집에서 빵을 구울 거예요. 집 냄새를 알게 해주려고요. 집에 돌아왔을 때 나던 빵 익는 냄새, 어른이 돼서도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요. 가족사랑이 넘치는 그 워킹맘에게 지지의 미소를 보내며, 아들 생각이 나서 참으로 속이 쓰리고 켕겼다.

32년 전 이 땅에 도착했을 때, 가족사랑은 기본이었지만 그보다 앞서는 건 생계였다. 운 좋게(?) 우리 가게를 갖게 됐을 때, 12시간 여는 가게를 택했다. 그때 거기선 보통 구멍가게를 15시간, 심지어 중동인들은 24시간 열었다. 하기에12시간 여는 가게는 그만큼 수익이 적었다

그러나 15시간여는 가게를 하는 이웃 한인은 밤 9시에 집에 돌아와 자는 아이들 얼굴 밖엔 볼 수 없어, 왜 일하는지 모르겠다고 서글퍼했다. 심지어 한 칠레인은 가게경영을 위해 아들의 고교진학을 포기시켰다고도 했다.

했기에 그 가게를 선택한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아이와 저녁밥이라도 함께 먹으려면 그 길이 최선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는 스스로 일어나 아침 챙겨먹고 알아서 학교에 갔다. 하교 후엔 정확히 3시면 가게로 전화해 귀가했음을 알렸다. 그러며 초중고를 개근으로 졸업했다. 제 인생 제가 알아서 산 셈이다.

주중이고 주말이고 외동인 아이에게 여분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이웃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블록파티를 해도, 동네 피크닉을 가도 그들은 혼자 집에 남아 있는 우리 아이를 챙겼다

언제 데리고 가고, 언제 데려왔는지 전화로 일일이 알려주던 의리파(?) 이탤리언들. 골목 끝엔 경찰서가 있었고, 그 바로 앞이 학교였다. 게다 우체국도 걸어갔고 도서관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아이 하나 기르기 위해 한 동네가 필요하단 말이 우리 아이에게도 적용된 셈이다.

그때, 일요일이면 아빠 친구 손잡고 교회 가던 아이, 방학이면 선생님 따라 캠핑가던 아이를 그래도 행운아라고 부러워하던 친지가 있었다. 그는 타코마를 거쳐 뉴욕에 정착한, 자동차 정비소 주인이었는데, 우리보다 더 먼저 도착했기에 더 심란한 가정 얘기를 갖고 있었다

500불로 도착한 그 부부는 서너 살 연년생 남매 둘을 맡길 데가 없어 (베이비 시터는 감히 꿈도 못 꾸었단다.), 먹을걸 주변에 흩어 놓고, 끈으로 다리를 묶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한 뒤, 문을 잠그고 출근했단다

미성년자가 보호자 없이 집에 남아 있을 경우 경찰이 아이를 데려간다는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가정엔 그 일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일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 와 술 마시며 그 부부는 이 얘기로 여러 번 울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술자리에 낄 시간을 못 내던, 골목 모퉁이 가게 한인 이웃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두 살아 돌아온 전사(戰士)들인 셈이었다.

요즘은 생존에 문화가 얹어져야 인간의 시간이 된다고 한다. 하기에 우리의 그 시간은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짐승의 시간이었다. 모든 초점이 생존에만 맞춰져 있었다

누구에게나 지나가야 할 시간이 있고, 우리의 시간은 이처럼 지나갔다. 회색의 빌딩 숲에서 아이를 기르며, 회의와 불안과 염려로 버무려 버텨냈던 나날들. 그 아이들이 이제 사십 대다. 다리를 묶여 집에 남겨졌던 딸 내미는 지금 월가의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로, 여가시간이면 맨하탄의 메이컵 아티스트로 제 시간을 즐기며 살고 있다.

아직도 비는 내리지만, 계절은 사과나무 하얀 꽃잎들이 아련히 흩날리는 봄날이다. 비 내리는 마을 처처에 숲이 있고 호수가 있는 이 고장으로 옮겨 주실 섭리를 그 시절에 알았다면 좀 덜 절망스러웠을까. ()의 시간이 지나면 합()의 시간을 주신다는 걸 그 시절엔 알 수가 없었다. 회색의 빌딩숲에서 자란 아이는 오히려 제 아이들이 대도시에 적응 못하는 촌놈으로 자랄까 봐 은근 신경 쓰이는 눈치다 .별 걱정을 다한다 싶다.

며칠 전엔 희한한 경험을 했다. 문득 눈에 들어온 앞차 번호판이 ALL7777이었다. 눈을 의심했다. 뒤따르며 재차 확인했다. 틀림없는 ALL7777. 혹시 주문번호판인가 한번 더 확인했다. 아니었다. 일반 번호판이었다. 저 번호판을 받았을 때 저 주인은 그 황당한 행운에 혹시 숨 넘어 가지 않았을까, 혼자 미소 지었다

살다 보면 저런 행운도 찾아온다. 그것이 주재하는 분이 주권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하기에 오늘도 나는 손주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베이글을 굽는다. 애비에게 못다 해준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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