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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21 09:06
[이효경의 북리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유는 선의 기쁨과 악의 슬픔을 알게 하기 위해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4,163  

이효경(UW 한국학도서관 사서)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민음사, 2007)
 
 
또다시 사랑이야기, 이번엔 신의 사랑
 
또다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에는 신의 사랑이다. 선악과에 내포된 신의 사랑이 궁금하다.선악과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신의 성품으로 이해한다. 자유의지를 마다할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로 인해 시작된 인간의 원죄와 그로 인해 줄줄이 사탕처럼 엮이게 된 인간의 운명과 죽음을 생각해 볼때, 자유의지가 아무리 좋다 한들 원죄의 탄생과 맞바꾸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죄의 도래를 불가피하게 한 선악과가 존재하지 않았기를 신에게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인류 역사상 신에게 가장 많이 호소했던 질문의 하나를 다시 던진다
 
일전에 지인과 함께 부모의 자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중에 가장 보편적인 행동 방식 중의 하나가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강압적이 될지언정 부모의 뜻을 따르도록 최대한 요구하는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드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데에는 일말의 의심이 없다.
 
한편, 그와는 다른 형태의 자녀 사랑이 있다. 컨트롤 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기회를 준다. 비록 원치 않는 길로 자녀가 가게 될지라도 성급히 부모의 뜻을 주장하기보다는 묵묵히 참고 기다려 준다. 선택 후의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무책임이고 방임으로 끝날지 모른다.
 
자녀 사랑에 있어서도 선택의 두려움이 있어
 
그러나 어떠한 선택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것은 자녀가 택한 자율적 선택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 가기를 원하는 부모의 또 다른 사랑 방식이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사랑인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자녀가 내 뜻과 다른 길을 가고자 할 때 내 의지대로 붙잡아 이끌기는 쉽지만, 자녀의 의지를 존중하고 그것을 감내해내기는 부모로서 훨씬 더 실천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더더구나 탕자의 아비처럼 언제든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아들을 두 팔 벌려 받아 줄 너그러운 마음까지 준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후자의 사랑을 어렵게 실천하고 있는 지인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자녀에게 강요하고 시키고 때로는 윽박지르기까지 해서 내 뜻을 끝까지 관철하고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불안한 나의 모습이 스쳐 간다.
 
독수리처럼 잽싸게 낚아채서 자녀를 늘 보호하고 막으려고만 했지 자녀가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선택을 주는데 인색했던 것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로 인해 올지도 모르는 훨씬 더 큰 리스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은 자유이자 신뢰였다
 
나의 사랑이 통제고 강요였다면 신의 사랑은 자유이자 신뢰였다. 신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주면서 강요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만을 허락한 통 큰 사랑과 무척 비교된다. 미리 정해둔 테두리 안에서 유한한 책임만 지려는 인간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 사랑에 길들어 있는지라, 무한한 신에게조차 강압적이고 구속적인 사랑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렇다면 신은 왜 그렇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한 걸까? 에덴동산 시절만이 아닌 현재도 신은 우리를 구속과 속박으로 이끌려 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유를 허락하는 신의 궁극적 이유가 궁금하다.   
 
더 큰 리스크에서 더 큰 사랑이 나오는 걸까?
 
나는 이 논제에 대한 해답을 우연히 단테의 책에서 찾는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지만 명료하다. 자유의지를 주신 신의 의도는 인간에게 선에 대한 기쁨과 악에 대한 슬픔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 중 <연옥 편> 16곡에 나오는 구절이다.
 
선악과는 금단의 나무였는데, 결국 그 나무를 통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니 이율배반적이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와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깊이라고 이해한다
 
탕자를 둔 부모의 마음도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자식이 탕자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련만, 탕자의 아비는 아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다. 아들의 어리석은 선택조차도 조용히 사랑으로 감당해낸다. 그러나 여기에 예상 못했던 놀라운 소득이 있다. 자유롭게 방황했던 탕자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의 크기를 제대로 체험했고, 아비는 아들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 기회를 제대로 얻었다. 더 큰 리스크에서 더 큰 사랑이 나오는 걸까?  
 
선택이 모여 인생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어떤 삶을 사느냐는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타율에 의해 삶을 살아가야 수도 있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자율적 선택은 확실히 내공을 쌓게 한다. 진정한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자기 주도적 삶으로 이끈다. 평범한 것을 배움에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선의 기쁨과 악의 슬픔을 아는 일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의 기쁨은 자발적 깊은 각성에게 누리게 돼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다
 
인간에 대한 신의 기대와 목적은 단순한 행위 그 이상의 선과 악을 아는 것임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자발적 깊은 각성에서 누리게 된 선의 기쁨은 자유의지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결코 체득하기 힘들다고 본다.  

단테는 책에서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하는 스스로의 빛을 지니고 있소.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오. 사람들의 마음을 창조한 더 고귀한 성품에 속해 있지요. 하늘도 이것을 넘어서서 통제를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문학의 절정이며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받는 시성(詩聖)단테의 『신곡』을 통해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자유의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이유를 찾는다.         
 
단테의 얼굴 궁금해서 읽게 된 책에서
천태만상의 인간의 얼굴들을 만나다
 
사실 단테의 『신곡』을 읽게 된 계기는 단테의 얼굴이 궁금했던 다소 엉뚱한 이유에서였다. 단테의 얼굴을 닮아 시인이라 불린 누군가 때문에, 나는 중세의 마지막 시기를 살다간 이탈리아 시성의 얼굴이 몹시 궁금했었다. 시인의 얼굴 뒤에 가려진 그의 삶을 엿보고 싶었고 그래서20여 년에 걸쳐 썼다는3부작<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신곡』에 이끌렸다.
 
단테의 얼굴을 『신곡』에서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단테는 각자 나름대로 선택을 하고 살아간 천태만상 인간의 얼굴을 만나게 해주었다.
 
전부 14,233행에 달하는 장대한 서사시는 지옥에서 연옥, 그리고 천국을 향해 순례하는 각양 각종의 사람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비명으로 가득한 지옥에서 울부짖는 사람들, 참회와 회개의 순례가 이어지는 연옥의 길을 걷는 사람들, 마침내 영원한 사랑과도 같은 순수와 환희로 빛나는 천국에서의 사람들 모습이 가득하다
 
실존의 인물들이 등장해 사실감을 더하고 방대한 역사적 배경은 중세까지의 인류 역사를 총체적으로 훑는 느낌마저 든다. 성서의 인물로부터 고대 신화적 존재들뿐만 아니라 역대 황제와 교황, 철학자 등 수백 명에 이르는 실존 인물들이 총 등장해 21세기의 현재와도 그닥 다르지 않은 온갖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의 사랑은 우리 얼굴에 스쳐간 흔적과 같아
 
모두 다 신이 부여한 선악과 앞에서 허락된 자유의지라는 거대한 신의 사랑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그들의 얼굴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고 긴 순례를 돌며, 신의 사랑이란 우리의 얼굴에 스쳐 간 흔적과도 같음을 느끼게 된다
 
단테는 말한다
우리의 영혼이 하찮은 장난감 같은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다면 창조주와 닮은 얼굴로 돌아갈 것이라고  

신의 얼굴을 닮기 위해 배움에 열중하는 단테. 선이 무엇인지 그것을 통한 진정한 기쁨은 무엇인지 탐구하며 앎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본다. 앎과 지식, 선과 악을 아는 나무 앞으로 활짝 열린 에덴 동산의 문은 우리를 신과의 진지한 교제로 초대한다. 그 앎의 길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첫발을 뗄 수 있지 않을까.
 
단테의 『신곡 (神曲)』 원제목은 <희극Commedia>이라고 한다. 책의 주인공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가서 결국엔 신을 만난다는 비극의 반대개념으로서 희극을 의미한다.
 
선악과라는 절망적 인간의 선택 뒤에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의 사랑이 인간의 비극을 덮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니 단테도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 이 긴 장정을 책으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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