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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6 17:10
김윤선/걸인의 팁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342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걸인의 팁
 
 
남자는 늘 첫손님이다
그리고 그가 사는 건 211, 깡통맥주다. 내가 이 가게에서 일을 하는 동안 그의 메뉴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거의 1 6개월이다. 하기야 남자는 그 이전부터 그것을 샀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도 꼬깃꼬깃하게 접은 종이돈 1달러와 동전75센트를 내밀고 서있었다. 돈에서 절은 땀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그가 거스름돈 1 센트를 잔돈 통에 넣는 것과 내가 종이봉투에 싼 깡통맥주를 그에게 내민 건 거의 동시였다.

“땡큐!”

호기를 부리는 듯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요즘 남자는 내게 자주 팁을 준다. 깡통맥주의 가격이 오르기 전엔 1 56센트를 받았는데 그가 1 60센트를 챙겨오는 날엔 5센트 동전을 잔돈으로 주었다.

그런데 그것의 가격이 1 74센트로 오르면서 남자는 1 75센트를 내밀게 됐고 이번엔 내 쪽에서 되레 1센트의 팁을 받게 됐다

가격이 오른 첫날, 그가 1센트의 동전을 잔돈 통에 넣었을 때 나는 적이 당황했다

하지만 남자 또한 어엿한 고객인 터, 뒤돌아 나가는 그의 등이 활짝 펴지고 어깨가 한 치는 올라간 듯했다.

남자가 어쩌다 걸인에까지 이르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겐 확연히 걸인 티가 났다. 덥수룩한 수염과 땟물로 범벅이 된 꾀죄죄한 얼굴, 세탁이라고는 언제 했을까 싶게 때 묵은 옷, 그의 몸에서 거의 떠나 본 적이 없어 보이는 그 옷은 원래 검정색이었는지 짙은 갈색이었는지, 아니면 연회색이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작년만 해도 그가 값을 지불하느라 줄을 서 있으면 어떤 신사나 숙녀가 그에게 샌드위치 하나를 사주거나 술값을 대신 지불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경기의 늪이 깊어갈수록 이젠 말붙이는 사람조차 없어졌다. 때문에 그가 이곳을 찾는 횟수 또한 줄어가고 있음에랴.

남의 차고에서 잠을 잔다는 남자, 밤새 온몸에 배였을 냉기가 오죽할까. 하지만 가게 문을 열기가 바쁘게 사러 오는 것 또한 밤새도록 냉기에 절은 냉장고 속의 깡통맥주라니. 빈속에 맞불을 놓으려는 남자의 속내를 눈곱도 떼지 않은 얼굴에서 읽는다

그리고 남자는 안다.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그곳을 치워놓는 것이 그나마 오래 기숙할 수 있는 방법임을. 살고 싶은 나라,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이민 오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나라, 미국, 그는 미국 시민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매일 아침 우리 집에 밥을 얻으러 오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여느 거지와는 달리 행색이 깔끔했는데 그 때문에 창백한 안색이 드러나 보였다. 낯이 익어가자 어머닌 동년배로서인지, 모성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는지 아침이면 으레 밥 한 그릇을 떠서 따로 얹어두고 여인이 오면 내보냈다

내가 여인의 소쿠리에 밥을 쏟아 부어줄 때면 우리 집인들 어찌 보리를 섞지 않았을까 마는 시커먼 보리밥 위에 얹힌 우리 밥이 눈처럼 희어 보였다. 여인은 깡통 대신 헝겊 보자기로 싼 소쿠리에 밥을 얻어 갔다. 아마 그 동안에라도 밥이 쉬는걸 막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여인이 오지 않는 날엔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왔다. 아이는 여인이 다니던 집을 잘도 알았다. 하기야 골목 안의 고만고만한 집들이란 게 어차피 빤할 터이지만. 사내아이는 수줍음을 탔고 밥을 주면 후딱 달아났다.

어느 여름날, 출근길에 급한 아버지께서 마루에 앉아 아침밥을 드시고 계셨다. 그 날도 어김없이 여인이 왔다. 여느 날처럼 나는 부엌에서 밥을 들고 나왔고 여인은 마치 날 마중하듯 대문 안으로 쑤욱 들어섰다.

“어머나!”

순간, 여인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부리나케 뛰어나가는 급한 발자국 소리, 내가 밥 한 그릇을 가지고 골목 한 바퀴를 다 돌아도 여인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 말씀이, 아마 학부형인가보다, 라고 하셨다. 그 후로 여인도, 사내아이도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여인은 무명 한복으로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아이를 앞세워서 손님으로 우리 집에 왔다. 아이가 전학을 가게 됐단다. 여인은 어머니께 깊이 인사를 했고 어머닌 여인의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때 여인이 왜 학교에 가지 않고 구태여 우리 집에 왔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두 여인 간의 인정도 있었겠지만 자식에 대한 반듯한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쩜 그녀가 갖고 다니던 보자기 덮은 소쿠리 역시 거지가 되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자존심이 아니었는지. 그러고 보면 남자의 팁 역시 그런 속뜻이 아닌가 싶다.

오후 들어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오슬오슬한 한기가 성큼 다가온 겨울을 말하는 듯하다. 한기를 잊으려는 듯 남자는 또 211 깡통맥주 한 개를 샀다. 얼른 잔돈 1 센트를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그것을 받아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넣는다. 비 오는 날엔 공치는 게 십상일 테니. 설핏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목소릴 높인다.

“땡큐!”

오늘, 남자는 아무래도 팁이 고민스러운가 보다.

<2011년 12월 한국일보 '삶과 생각'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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