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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7 23:33
정동순/호미와 연필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484  

정동순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호미와 연필


호미를 들고 나가 땅을 파 보았다호미는 어머니의 등을 긁어주던 효자손처럼 흙의 표면만 긁어 댈 뿐 땅을 깊이 파지 못한다호미날은 겨우 작은 깻잎만큼 남았고 나무 손잡이의 끝은 뭉실하게 닳아 있다

주인이 흘린 땀에 쇠붙이마저 녹아내린 때문일까낡아서 땅을 잘 파지 못하는 호미는 대신 어떤 기억 하나를 파 낸다

한여름 더위에 어머니를 따라 밭을 매러 가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었다햇볕이 너무 뜨거워 길이 노랗게 흔들리며 어지럽기까지 했다그래도 어머니를 따라나섰던 것은 호랑이도 나온다는 산밭에 어머니 혼자서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밭일을 하면서 어머니가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밭을 매는 동안 옛날이야기 뿐만 아니라 살아오신 이야기들이 실타래가 풀려나오듯 끝없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풀어놓는 실타래를 놓칠세라 귀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열어두고 건성건성 김을 매며 밭고랑을 따라갔다
 
어머니의 밭고랑에는 시대가 뿌린 억센 풀들이 어찌 그리 많았던 것일까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이 어머니의 젊은 날이었다일제강점기 때 향촌에서는 아직도 서당 교육이 대세였고 드물게 일제(日帝)가 세운 소학교가 있었다하지만 여자들이 다닐 학교는 없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헌 것이 한이제여자로 태어나 배우지도 못허고 가문을 잇지도 못허고 인생이 꼬여부렀다어느 해던가 동네에 야학이 들어왔제야학에 가서 한글을 배웠는디 잘했다고 상으로 연필을 받았어야난생 처음으로 연필을 만져 봉게 얼매나 신기하고 좋던지!우리 할아버지한테는 귀헌 한문책들이 수레로 실어낼 만큼 많았제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걸 다 물려받았을 턴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보니까 그 많던 책들이 다 어디로 사라져 부렀는지 해평 아재 집에 몇 권만 남아 있드라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어머니는 딸들이 호미를 잡기보다는 연필을 잡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고된 농사일에 새까맣게 그을린 촌 아낙네의 얼굴로 면사무소나 농협에 일을 보러 갈 때마다 기도하셨다고 한다

당신의 딸들도 저렇게 그늘에 앉아 펜을 잡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매일 아침 일어나 정안수를 떠놓고 비는 것도 모두 자식들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자매들에게 뜨개질이나 자수 같은 것을 전혀 못하게 하셨다그런 것 할 시간이 있으면 글이라도 한 자 더 읽으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바람은 다섯 딸 중에서 세 딸이 교편을 잡게 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언니에 이어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게 되었다동생도 대학 졸업 후 곧 교직에 들어섰다.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내가 사는 양을 보려고 어머니가 오셨다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들이 말은 잘 듣대옛말에 선생 똥은 개도 안 묵는다고 했다속상한 일이 있어도 항시 남의 아이들 귀히 여기고 잘 가르쳐라근디 월급은 얼매나 받냐?"

"보너스랑 합쳐서 한 백만 원 받아요."

"허허 그러면 쌀이 열 가마니네니 한 달 월급이 내 일 년 농사보다 낫다."

어머니는 호미 대신 '연필'을 잡은 딸이 자랑스러웠는지 이마를 쓰다듬어 주셨다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교편을 놓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태 전이었다오래 벼르던 끝에 태평양 건너 우리 집에 오신다고 하셨다나는 어머니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놓고 어머니께서 오실 날을 기다렸다그중에 으뜸이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 드리는 것이었다

막상 어머니가 오셨을 땐 두 살짜리와 여섯 살짜리 아이들 뒤치다꺼리로 바쁘기만 했다또 과외와 도서관의 시간제 일로 바쁘게 집을 드나들었다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무척 속이 상하셨던가 보다

"그 좋은 직업을 놔두고 와서 여기서 왜 이 고생이냐?"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격려는 못 해 줄망정 왜 그래요?"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짜증을 내었다.
어머니는 무료하실 때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히 아이들이 읽는 전래동화집을 읽곤 하셨다

"아이고 어찌야 쓰까얼른 가서 콩쥐 눈물 좀 닦아줘야 쓸 턴디..."

"심 봉사가 눈을 번쩍 떴구나어쩜 요리도 맛깔스럽게 썼을까이?"

돋보기를 쓰고도 어머니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곤 하셨다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 드리고 어머니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도록 맞춤법에 맞는 글쓰기도 가르쳐 드리고 싶었다허나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 것 하나 실천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 잘 깎은 새 연필 몇 자루와 공책을 가방에 넣어 드렸다어머니는 연필을 기쁘게 받으셨다

"하이고요새 연필은 좋기도 허다내가 이 연필로 글씨 연습도 허고 너한테 편지도 쓰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니 고향 집 수돗가 나무 기둥에는 세 자루의 낡은 호미가 걸려 있었다그중에 손잡이가 유난히 반질거리던 한 자루를 가져왔다

잡초를 뽑고 밭고랑의 흙을 파던 어머니의 호미가 심었던 것은 무엇일까어머니의 유품이 된 낡은 호미를 만져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와 밭을 매러 다니던 어린 시절 김은 잘 매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들은 부지런히 내 실꾸리에 옮겨 감았던 것 같다

이제는 어머니 스스로 쓸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써 드리는 것이 내 소원이 되었다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서 언젠가 당신의 산소에 바치고 싶다그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도시에서 방황하던 시절의 내 생도 뙤약볕 아래 뿌리 뽑힌 잡초처럼 나동그라졌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의 원대로 연필로 글밭을 일구며 살고 있으니 이제는 내 실꾸리에 옮겨 감았던 어머니의 사연들을 지상에 풀어내고 싶다

어머니의 연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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