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감성의 유럽 여행 에세이’
그리스와 이탈리아 체류 경험 엮어
이 책은 UW 한국학도서관이 한인교양 프로그램으로 ‘북:소리(Book Sori)’를 진행하게 되면서 단지 ‘북소리’라는 동일 단어에 이끌려 애정을 갖고 찾게 된 책이다.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기에 마침 한국 여행길을 앞두고 있어 구매를 위해 메모해 두었다. 출판된 지 20년이 지난 오래된 책이어서 동네 작은 서점에 혹 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명성 때문인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한 나의 개인적 최대 관심사는 『먼 북소리』의 ‘북소리’가 하루키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 지였다. 설레임 가득한 마음으로 책을 마주하고 보니 ‘낭만과 감성의 유럽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마침 여름 휴가철이기도 했고 나 또한 여행지에 와서 읽는 하루키의 여행기여서 시작부터 제대로 주인을 만난 느낌이 책 읽는 즐거움에 불을 붙였다.
하루키는 어디선가 들려온 먼 북소리에 이끌려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북소리에 이끌려 3년간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체류했던 경험을 책으로 엮었다.
하루키의 여행기는 그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한 글이었다. 그가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나이는 불과 38세였고, 여행의 동반자는 그의 아내였다는 것, 유럽 체류기간에 그의 대표작인『상실의 시대』를 썼고, 그는 주로 오전에 집에서 글쓰기나 번역 작업을 하고 오후가 되면 아내와 함께 시장에 가거나 문화생활을 즐기며 동네 레스토랑에 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본인답게 그는 생선류를 즐겨 먹었고 포도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키가 약간의 그리스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 또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여행 중 만난 그리스인들을 모두 ‘조르바’를 닮았는가 아닌가로 비교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그리스
작가인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싶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품이나 성격이 여행기 속에서 잘 전해져 왔다. 그가 쓴 『해변의 카프카』의 작품 속 소년 주인공이 어쩌면 하루키 본인과 무척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갖게 해주기도 했다.
여행을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된다. 그의 여행기 한 권을 읽고 나니 하루키와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느낌이다.
서른 여덟 살의 젊은 하루키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 작가로서가 아닌 마치 학창시절의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던 대학 친구나 선배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소설과는 달리 에세이를 읽는 맛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다 끝내지 못한 젊은 날의 방황을 다시 시작할까?
마흔 살을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삼았다고 하는 하루키는 어느 날 삶의 터전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면서까지 삶의 의미를 되찾고 재정립하려 했다. 더 늙기 전에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정립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였을까. 책을 읽는 독자들도 하루키처럼 미처 다 끝내지 못한 것 같은 젊은 날의 방황이라도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인생의 길이 온전할 것 같은 불안감이 마구 쌓여갈 무렵, 어느새 500페이지가 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게 된다. 마치 하루키의 긴 방황과 같은 여행의 끝에 도달한 기분이 든다.
그가 남긴 마지막 결론은 마치 숨 가쁘게 몰아온 여행의 고단함을 씻겨주고 그 동안 방황하던 마음의 동요를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기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낸 그런 삶의 방식만 부럽게 느껴져
하루 하루를 과도기적이고 일시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보통 여행기를 읽고 나면 그곳에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분명 유럽 여행기를 읽었지만, 하루키가 다녀온 그리스의 스펫체스섬이나 미코노스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이상하리만큼 들지 않는다. 단지 그가 여행지에서 보낸 그런 삶의 방식만 부럽게 느껴질 뿐. 마치 하루키의 체면에라도 걸린 것 같다.
새로운 객지에서 이방인으로 체류하며 색다른 체험으로 하루하루를 과도기적이고 일시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그 욕망은 ‘먼 북소리’만큼이나 잔잔하고도 은은하게 그러나 끊이지 않고 오래 오래도록 읽는 독자를 압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