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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13 20:42
김윤선/가짜로 산다
 글쓴이 : 김윤선
조회 : 4,740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가짜로 산다

“어머, 네가 왜 여기 있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가방이다. 쟁여 놓은 옷장 속에서 잔뜩 심사를 구겼는지 구김이 짙다. 하지만 또렷하게 프라다 상표를 달고 있는 게 제 자존심인 듯해서 얼른 얼렀다.

그 날, 한 보따리의 가방이 쏟아지고 우리는 저마다의 구미에 맞는 크기와 무늬를 골라잡느라 희희낙락, 입방아를 찧어대며 수선을 떨었다. 눈여겨보지 않아도 가짜라는 게 금방 들통 날 일이지만, 진짜를 닮은 모습 때문에 우리의 가벼운 주머니를 위로하는, 밉지 않은 애물이었다.

그 해 여름, 싼 가격만큼이나 마음 또한 가벼워서 달랑달랑, 참 많이도 들고 다녔다.
백화점보다 싼 가격이라며 잡아끄는 친구를 따라 중앙시장에 갔을 때, 나는 명품을 꼭 빼 닮은 옷가지들에 넋이 나갔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백화점에선 수 십 만원씩 하는 옷을 닮은 것들이 이곳에선 기 만원이면 됐다. 더더구나 명품의 상표를 부끄러움도 없이 달고 있었다. 나는 미쏘니 조끼를 골랐다. 마침 가방 하나를 고른 친구에게 주인이 물었다.“무슨 상표를 달아 드릴까요?”

안쪽에서 명품 상표 서너 개를 꺼내 오더니 원하는 상표를 고르란다. 하도 신기해서 그 중 하나를 골랐더니 5 분도 안돼서 그 상표를 달아줬다. 누가 봐도 루이비통, 명품 가방이다.
“질도 좋아요.”구태여 주인의 말이 아니어도 우리는 횡재를 했다며 들떠서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서 고른 조끼는 프라다 가방처럼 옷장 어디쯤엔가 박혀 있을 게다. 우스갯소리로 명품 가방을 구분하는 건 주인의 태도란다. 가방을 땅에 놓으면 가짜, 품에 안으면 진품이라는 것이다. 내 프라다 가방도, 미쏘니 조끼도 그것들이 가짜임을 내 스스로 내보인 셈이다.

깡통시장은 부산에서 외제품을 파는 골목시장이다. 해방 이후, 쏟아져 들어온 미군 물자들은 이곳에서 구하지 못하는 게 없었다. 없는 것 빼고 다 구한다는 곳이었다. 

어머니께서 어린 내게 분홍색 레이스 달린 구제품 원피스를 사 주신 곳도 이곳이었고, 흰색 에나멜 샌들을 사주신 곳도 이곳이었다. 오늘날 네스카페니 초이스 커피의 맛을 알게 한 곳도 이곳이었다.

그곳엔 언제나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몰래 숨어서 들어온 명품들은 은근히 찾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아는 사람만 살 수 있는 귀한 몸이었다. 가격 형성이 되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이었으니 바가지를 쓰는 건 당연했다.

진열대에서 물건들이 부리나케 사라지는 때가 있었다. 경찰의 특별단속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특별단속의 정보가 막상 이곳에서는 줄줄 새고 있는 것이었다. 어영부영 그 기간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물건들이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가짜가 많다는 심상찮은 소문이 돌면서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자 그들이 백화점의 면세점으로 옮겨 갔다고도 하고, 아예 해외의 쇼핑도시를 찾아 다닌다는 소문이 돌더니 급기야 깡통시장은 퇴기의 주점마냥 쇄락해져 갔다.

진품인 줄만 알았던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들 중에도 가짜가 많다는 뉴스를 들었다. 시대의 흐름을 타서인지 명칭도 짜가에서 짝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진품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 전문가의 눈을 속이는 것들도 있어 수준에 따라 진품 가격에 버금간다고 하니, 나 같은 사람이야 눈 뜬 봉사나 다름없는 터, 씁쓰레한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가짜가 어찌 그뿐일까, 명문대를 사칭한 신랑 후보, 고위직 인척을 사칭한 사기꾼, 가짜 학위, 가짜 졸업장, 성형수술로 인한 가짜 미인의 양산으로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바야흐로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내 몸에도 가짜가 수두룩하다. 다초점렌즈의 안경을 이용한 시력, 임플란트 치아, 염색한 검은 머리, 매니큐어 칠한 손톱과 굽 높은 구두에 숨겨진 키.

지금 프랑스에서는 한류열풍이 대박을 터뜨리는 모양이다. 문화의 첨단도시라는 파리에서 우리의 가요가 그곳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단번에 명품 가수들이란다. 하기야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를 되찾아오는데 그들의 마음을 사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145 년, 그나마 영구반환이 아닌 장기 대여라는 이름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찾아 온 것에 비하면 한 순간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젊은 가수들의 열정과 재능을 어찌 명품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으랴. 뿐이랴, 이들이 소속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주식에 투자한 사람은 3년 새 28배의 부를 늘렸다고 하니 과히 명품의 세를 이어간다 할 만하지 않은가.

평창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큰 몫을 한 김연아 선수는 85조 원의 국보급 명품이란다. 한국은 몰라도 김연아는 안다는 명품의 반열, 과연 명품이란 무엇일까. 흉내 낼 수 없는 열정과 독창성, 그 위에 겨눌 수 없는 품위를 지닌 저만의 품격이 아닐지. 빙산처럼 숨겨진 그들의 땀과 눈물이 일궈낸 결과, 명품 옷만으로 명품 인간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오랜만에 여름 햇살이 가득하다. 들뜬 마음으로 프라다 가방을 팔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 굽 높은 샌들 사이로 빨간색 발톱이 햇빛에 반짝인다. 염색 냄새가 가시지 않은 검은 파머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십 년은 족히 젊어 보이리라. 달랑달랑, 가방을 흔든다.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온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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