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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21 23:01
김윤선/텃밭에서
 글쓴이 : 김윤선
조회 : 3,623  

김윤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텃밭에서

 
오늘 아침, 텃밭이 유별나다.
이파리마다 물방울을 대롱대롱 달고 있는 풋것들이 막 등멱을 끝낸 여인들 마냥 생기가 돈다. 요 며칠, 짙은 구름이 잔뜩 끼고 무더위가 계속되는 게 꼭 한국의 장마 날씨를 닮았다 싶더니 새벽녘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말이 텃밭이지 손바닥만한 땅떼기다. 하지만 나는 마치 비밀 하나를 숨겨 놓은 아이마냥 아침마다 텃밭을 찾는다. 밤새 풋것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열매는 맺혔는지, 아침을 맞는 각기 다른 얼굴들이 여간 기특하지 않다.

실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주워들은 상식으로 이른 봄에 흙 갈이를 했다. 그 덕분에 부추도 두어 번 잘라 먹고 상추도 두어 번 뜯어 먹었다. 어제 저녁엔 갑자기 비빔국수를 먹고 싶다는 남편의 입맛에 맞춰 텃밭에서 상추와 부추를 잘라 겉절이를 만들고 나니 어깨가 다 으쓱했다

하지만 작황이 신통찮다. 물주기도 소홀하지 않고 햇빛도 남다르지 않은데 작황이 그러한 건 아무래도 토양 문제인 듯싶다

밭도 밭 나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다. 잡초만 키운 땅에 무슨 영양이 있을까. 덜렁 공명첩만 샀다고 금방 양반 되나, 한 포대의 흙으로 풍성한 수확을 바란 내 어리석음이 부끄럽다.

작년에 친구 집에서 얻어다 심은 딸기 모종에서 운 좋게 여남은 개의 딸기가 열렸다. 초록색의 잎 더미 속에서 수줍음을 숨기지 않는 딸기가 어쩜 저리도 앙증맞은지. 하지만 줄기에 박힌 가는 가시들이 열매를 지키기 위한 은장도쯤으로 여겨지니 세상 순리가 참 기막히다

대롱대롱 매달린 저 연약한 열매조차 생명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겪는다는 게 어찌 경이롭지 않을까.

그런데 그새 개미인지 달팽이인지가 갉아 먹었는지 두어 개는 이미 흠집이 생겨서 못 먹게 됐다. 먹이사슬이 저라고 비껴갈까, 오늘은 내 차례다. 아까운 걸 다 저들에게 뺏길세라 잘 익은 것만 대여섯 개를 따서 남편과 나눠 먹었다. 억세 보이는 겉모양과는 달리 달고 섬유질이 무척 부드러웠다. 남편도 나도, 첫 수확에 마음이 들떴다.

재작년에 마당 한 켠에 심었던 체리나무에서도 열댓 개의 체리가 열렸다. 작년엔 딱 세 개의 열매가 열렸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아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새의 소행이었다. 고놈, 그새 가로채다니. 하기야 먹이를 눈앞에 둔 생존경쟁에 무슨 양보의 미덕이 있을까.

실은 아침마다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런데 다행히 놈들도 작년의 소행에 대한 양심이 있었던지 열매는 온전하게 잘 익어 갔다. 그런데 아차, 또 기회를 뺏긴 것이다. 내가 거의 익었다고 느낄 때쯤 놈들도 그랬나 보다. 오늘 아침에 보니 서너 개가 줄어 있었다. 마음이 바빠졌다. 뺏길세라 익어 보이는 것 대여섯 개를 땄다. 아까워서 손대기도 조심스럽지만 어쩌랴, 설레는 마음으로 딸아이에게 주었다.

“이게 전부예요? 그냥 새들이 따먹게 놔두지, 뭘 엄마까지 따요? 우리는 사 먹으면 될 걸.

순간, 머리를 한 대 쥐어 박힌 느낌이었다. 이런 인정머리 하고는. 토양이 거칠면 마음 씀씀이라도 곱든지, 이도 저도 아닌 맨땅에서 어찌 좋은 글쓰기를 바랄까. 텃밭은 어느 새 내게 글쓰기의 근본부터 가르치고 있었다.

고향집 텃밭은 살아 있는 식단이었다
싱싱한 오이와 잘 익은 가지를 덥석 움켜쥐었다가 잔가시에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배웠으니 텃밭은 그대로가 삶의 현장이요, 배움터였다. 그곳에만 갔다 오면 절로 입맛이 돌았다

매운 고추 다져 넣고 만든 양념간장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비우게 했고, 볼이 미어지게 먹는 쌈밥의 묘미를 즐기게 했다. 뿐이랴,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쳐도 숟가락 하나쯤은 언제든 끼어 앉을 수 있는 밥상을 만들었고 첫 결실을 맺은 애호박이, 토마토가 담을 넘나드는 것도 다 텃밭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텃밭은 인정을 나누는 작은 샘 같은 것이었다. 옮겨온 고향의 텃밭, 시나브로 내가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는 이유다.

텃밭 곳곳에 잡초들이 눈에 띈다. 힘겨루기가 이곳엔들 없을까. 토끼풀, 민들레, 질경이 등, 잡초들이 그새 끼어들어 종족 번식의 현장을 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가리지 않고 품어 주는 텃밭, 어머니의 품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을 터, 어찌 바람 끝에 실려 온 지친 종자의 종류를 가릴까.

바람에 산들거리는 상추와 부추의 이파리가 당차 보인다. 한국 품종이라며 조심스럽게 건네주던 그들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그것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가를 알게 한다.

언제, 상추를 한 소쿠리 따서 부추를 준 친구에게 주고, 부추는 상추를 준 친구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삶에 온기가 돈다.

새에게 열매를 남겨 두라는, 사람이나 새나 같은 생명체라는 딸 아이의 가슴에서 자라는 사랑이 듬직하다. 씨를 나누고 모종을 나누게 하는 마음을 일게 하는 텃밭, 내 마음 밭에서 자란 글도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글이 됐으면 좋겠다.

텃밭에서 숨고르기를 한다.




시애틀 13-09-24 15:47
답변 삭제  
상큼한 맛이 나는 글이네요. 내 마음 밭에서 자란 글도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글이 됐으면 좋겠다는 표현에서 겸양의 미덕이 느껴지네요. 이 글에도 큰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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