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시인(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환상(幻像)
가을바람에 업힌 낙엽 한 장
파울첼란*의 형상으로
빛이 그리운 양
유리창을 두드린다.
어둠의 옷을 입은 낙엽 시인은
사라졌다가 되살아나며
「테네 브라에」 기도시를 읊는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 하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빛과 어둠, 창안과 창밖사이
밤새 넘나드는 낙엽,
이젠 릴케의 얼굴을 하여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소서”*
그의 음성이 잘 익은 포도주 빛이다.
아침 햇살이 어둠을 밀어내고
갈 곳 잃은 그 낙엽의 시인들
창밖에 발을 구르며
떠나지 못하고 있다.
*파울 첼란: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 시인, 프랑스의 교수.
*릴케: 「가을날」에서 남국의 햇볕을 위한 기도시를 쓰다.
<해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유리창을 두드리는 가을 낙엽에서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과 릴케의 환상을 본다. 파울 첼란은 빛을 찾는 어둠의 존재로 형상화 된 점에서 가을의 계절에 적절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독일 나치정부에 학살된 자기 민족과 가족의 비참한 역사에 비통한 죄의식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죽기 전 그의 시「테네 브라에」에서 자기 동포들을 위한 간절한 구원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울러 작가는 낙엽을 릴케의 환상으로 환시하고 그의 「가을날」에서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으로 “과실들을 익게 해 달라”는 음성을 환청한다. 이 릴케의 햇볕은 과실뿐만이 아닌 노숙자와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시인의 휴머니즘을 표출하는 심상이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앞에 둔 가을을 맞아 낙엽이란 물상으로 곤핍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빛을 추구한 시인들을 상징화하여 자신의 무의식적 인간구원의식을 표현한 점에서 그의 시창작의 가능성을 밝게 비추이고 있다.
<김영호 시인(숭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