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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0-04 22:52
김학인/진주조개의 눈물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514  

김학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진주조개의 눈물

 
오랜만에 그의 소식을 받았다

짧은 글이었지만 내겐 어느 때보다 용기와 희망으로 다가왔다. 휴대폰에서 발신전용으로 보내온 것이라 회신이 안 되지만 이번에는 사진도 두 장 첨부됐다

10여 년 전이나 다름없는 그의 온화한 모습이 담겨있어서 나는 지난날의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20년 가까이 같은 뜰을 밟으면서 가끔 마주치는 그의 얼굴은 늘 잔잔한 미소가 묻어있어 사람을 편하게 했다

어느 날 오후, 모처럼 찻잔을 마주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일상적인 이야기 끝에 개인적인 말을 아끼던 그가 가슴에 고여 있는 아픔의 가닥을 풀어냈다

반백의 나이에 아직도 희석되지 않은 젊은 날의 상처는 뉘겐가 털어놓고 싶을 만큼 그를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첫사랑과 가정을 이루어 봄날의 꽃밭처럼 아롱진 꿈을 키워갔으나 그 행복은 짧았다. 어린 남매를 둔 채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아내. 그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떠난 사랑은 때 없이 가슴을 파고들어 잠을 설치게 했고 그는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기 일쑤였단다

이태가 지난 후 ‘어린 아이들을 봐서라도’라는 이유로 주위에서 밀어붙인 여인은 착하고 부지런했다. 한데 웬일인지 정은 가뭄을 탔다

셋째가 태어난 후부터는 그냥 살아간다면서 설핏 어리는 그늘을 떨치고 그의 눈길은 찻잔을 더듬고 있었다. 한결같은 표정 뒤에 감정의 절제를 위해 쌓은 내공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한동안 그는 위궤양 때문이라며 보온병에 담아온 죽으로 점심을 때웠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바쁜 생활에 묻혀 지내며 정년퇴임을 앞두게 됐다

하루는 가까운 동료 둘을 불러 점심자리를 마련했다. 평소보다 한 자락 낮은 음성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다 보면서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심을 굳히게 되었기에 그 길로 모교의 의과대학을 찾아가 사후(死後) 신체기증을 서약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가족동의서를 받기 위해 어려운 말문을 열었는데 예상대로 아내와 자녀들은 길길이 뛰며 집 안을 발칵 뒤집어놨다. 아버지의 완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안 자녀들은 한달 여 만에 풀이 죽었다

모든 절차를 끝내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더없이 홀가분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얼른 그의 시선을 피해 마시다 남은 녹차 한 모금으로 마음을 가라앉혔으나 돌아오는 발걸음은 납덩이를 끌고 가듯 무거웠다.

나보다 두 해 앞서 퇴임한 그가 한의학을 공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병약했던 그가 인생의 후반기에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얼마 후 병마가 그를 덮쳤다는 놀라운 소식이 실려 왔다

, 의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건만 아직도 고비가 남아 있었구나.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서글프고 답답했다. 그랬는데 이번 글 중엔 제 4세대에 주목받는 사이버나이프(cyberknife) 치료법으로 암이 완치된 지5년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끼어 있었다

나는 그간의 안타까움에서 놓여나 후련해진 마음으로 그의 회복을 진심으로 감사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 재혼의 갈등, 투병으로 점철된 삶을 뚫고 의연히 일어선 그 사람

게다가 때가 되면 벗어야 하는 육신까지 연구 자료로 기꺼이 제공한 그의 삶을 진정 명품인생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변함없이 밝은 사진 속의 그를 보면서 문득‘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라는 시 한 줄이 떠오른다. 조개가 먹이를 먹을 때에 모래나 작은 알갱이 같은 이물질이 조개 속으로 함께 파고 들어온다

그것들은 여린 속살에 상처를 입히게 되는데 조개는 몸을 보호하고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고통을 무릅쓰고 몸 속에서 하얀 우유 빛 화학물질을 계속 분비한다. 그 물질들이 상처를 동글동글 둘러 층을 쌓아 나가면서 마침내 영롱한 진주가 탄생된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진주를 ‘진주조개의 눈물’이라고 말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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