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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1 03:08
[시애틀 수필-이한칠] 채비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865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채비

 
나는 채비란 말을 좋아한다. 채비는 어떤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물건이나 자세를 갖추는 것이라고 한다. 큰일은 물론, 사소한 일에도 당연히 채비가 필요하다. 채비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경우의 결과는 사뭇 다르다.

어머니는 그 옛날에 아기인 나를 우량아 선발 대회에 참가시켰다. 으뜸상 상품으로 주발을 받았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면서 대견해 하셨다. 나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그래서인지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은 나보다 한두 살 위였다. 친구들이 여덟 살이 되니, 나만 빼고 모두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나는 연령 미달로 동그맣게 남아 혼자 놀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부모님은 막내 아들의 그 떼를 못 이기는 체하시며, 학교 갈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어린 나를 입학시키셨다.

친구 대부분은 받아쓰기 등 글과 셈법을 미리 익히고 온 듯했다. 아뿔싸, 덩치만 믿고 아무런 채비 없이 학교에 갔던 나는 첫 받아쓰기 시험에서 영점을 받는 수난을 맛보았다

친구들과 학교에 갈 수 있어 한껏 들떴던 마음이 사그라들려던 순간이었다. 부모님은 형들에게 나의 가정교사 역할을 번갈아 가며 하게 하셨다. 그 덕에 어린 나이에 학교생활을 쉽게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나는 매주 등산을 한다. 어느 날, 산에 오르기 직전에 등산화를 집에 놓고 온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것을 잊고 왔다면 모르지만, 중요한 등산화를 놓고 왔으니 발길을 집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 허허로운 마음을 안고 장거리 운전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등산 채비를 더욱 단단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대충대충 꾸리던 배낭을 철저히 하고, 그밖에 필요한 것들을 차근차근 챙기게 되었다. 갖추어야 할 것들이 의외로 많다

또한, 산을 오르기 전에 충분한 준비운동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산에서 내려올 땐 천천히 움직여 무릎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내 몸을 갖추어야 한다.

아내와 외출하려고 집을 나설 때면, 내가 매번 기다린다. 언젠가 기다리다 못해 차 시동을 걸고 있었다. 아내가 쪼르르 나오더니, 시동을 끄고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무슨 채비가 그리 많으냐며 핀잔을 주자, 적반하장으로 내게 명령이 떨어졌다. 앞으로 미리 나가지 말고 현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본인이 채비를 다하고 내려올 때까지 책을 읽으며 기다리라고 주문했다. 채비를 다 안 했는데 내가 미리 나가 있으면 불안하다나…. 

요즘도 함께 외출할 때면, 나는 현관 앞 그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착하게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들은 채비할 게 참 많은가 보다라고 중얼거리며…. 

친구들이 시애틀에 사는 나를 찾아올 때면, 나는 막걸리를 빚는다. 취미로 하는 막걸리 만들기 역시 채비가 필요하다. 질 좋은 누룩, 찹쌀, , 술 항아리, 면 보자기, 가는 채 그리고 찜통 등 채비할 물건이 즐비하다

그뿐이랴, 나는 정수기 물을 받아 가라앉혀 윗물을 사용하고, 소독한 술 항아리도 준비해 둔다. 재료를 정확하게 계량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맛좋은 막걸리가 탄생한다. 막걸리야말로 채비 없이 잘 빚어지기 어렵다.

글쓰기에도 채비가 꼭 필요하다. 글을 쓴다고 여러 사람에게 알린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아직도 글쓰기 채비를 갖춘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온갖 잡념이 든다. 날씨가 좋으면 골프나 등산 계획 짜기에 분주하고, 집에 있을 땐 그날 있을 야구나 미식축구 경기 중계에 마음이 간다

낮이나 저녁 시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너그러운 나를 발견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하라는데, 이런 핑계로는 다독, 다상량을 실천하기 어려우니 다작은 더욱 어려울 뿐이다. 최근 아침 1시간은 낮 시간의 세 배와 맞먹는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그렇다. 낮에 3시간 내기도 쉽지 않거니와, 여러 가지 분심으로 글쓰기가 여의치 않다. 조만간 은퇴한 뒤에는 소중한 아침1시간을 내어 글쓰기 채비를 다져 보아야겠다.

어느새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 은퇴준비라고 하면 대부분 재정적인 부분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재정이 잘 되어 있다면 삶의 질에 영향은 주겠지만, 재정 못지않게 준비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많다. 건강, 좋아하는 일, 그리고 대화를 나눌 친구 등이다. 은퇴 채비를 잘 해 놓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얼추 이룬 셈이다.   

채비 없이 친구 따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때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매화 향기 머금은 봄 햇살이 눈부시다. 3월이다. 봄맞이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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