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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4 18:29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그 청년, 수선화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603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그 청년, 수선화

 
기분 좋은 화요일이다. 입구에 늘어선 노란 수선화가 방긋방긋 웃으며 손님을 반긴다. 매장에 들어서면, 그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눈길이 먼저 간다. 오늘도 마치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그가 멀리에서도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장보기가 시작된다. 그는 늘 귀 밑에 커다란 미소를 달고 다닌다. 매장을 돌다가 몇 번을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구레나룻에 한껏 모양을 낸 멋쟁이. 월마트의 야채 코너에서 일하는 흑인 청년이다.
어느새 그가 다가와 물건 담을 빈 상자를 카트 아래 선반에 넣어준다. 여분의 상자를 두었다며 건너편 구석을 가리킨다. 밝은 웃음을 한가득 안겨주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길 또한 즐거워 보인다. 빠른 손놀림으로 물건을 가지런히 쌓고 정리하는 솜씨가 남다르다. 매일 반복되는 작업이 지루할 법도 하건만 그의 얼굴에선 웃음꽃이 지지 않는다. 그의 손을 거쳐 진열대 위에 올라앉은 과일과 야채들은 농장에서 막 따온 것처럼 푸른 물이 가득하다.
그는 나를 ‘미스 킴’이라고 부른다. 남편과 먼저 통성명을 한 그가 왜 나를 ‘리’가 아닌 ‘킴’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다. 미스 김. 오랜 시간을 단번에 뒤돌려주는 기분 좋은 말이다. 성씨마저 바뀌어 버린 이국땅에서 아버지가 물려주신 성씨를 불러주는 청년. 그를 보면 고향 친구라도 만난 듯 마음이 따뜻해지곤 한다.
그의 날씨는 항상 맑음이다. 삶에 어찌 화창한 날만 있을까마는 그의 하늘에는 언제나 해가 떠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먹구름 보다 구름 너머의 밝은 태양을 볼 줄 아는 깊은 눈을 가진 청년.  곁에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지는, 비타민 같은 사람이다.
가게에서 일할 때면 수많은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마음이 맑은 날이면 모두가 반갑고 고맙다. 활짝 핀 웃음으로 손님들을 대한다. 그러나 기계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거나 좀도둑이라도 잡은 상황에서는 곧바로 얼굴에 먹장구름이 낀다. 그렇다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손님들을 대할 순 없다. 그런 날에는 탈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탈춤 추듯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십 년을 지내다 보니 탈의 두께도 두꺼워지고, 표정도 제법 너그러워진 듯 보인다. 하지만 탈의 표정과는 달리 너그럽지 못한 마음 때문에 탈은 여전히 구석에 걸린 채 덜거덕 떨거덕 소리를 내고 있다.
늘 마음이 문제다. 넘치는 것 보다는 부족한 게 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마음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쩌면 더 채우지 못하는 탐욕과 조급함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핑계일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을 놓지 못해 수시로 흔들리고 변하는 내 마음은 언제나 맑은 하늘 품을 수 있을까. 모순투성이인 나의 모습이 성실한 한 청년을 통해 비쳐지고 있다. 오늘, 그는 말간 거울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그는 수선화를 닮았다. 항상 웃는 얼굴이 노란 꽃 등불로 주위를 따스하게 밝히는 꽃송이 같다. 그의 이름은 죠셉이다. ‘죠셉’이란 ‘더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좋은 것들이 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부모 또한 그 이름을 불렀으리라. 그 부모의 마음에 내 마음을 더한다. 수선화의 알뿌리가 퍼져나가 해마다 꽃을 보는 기쁨이 더해지듯이 그의 삶에도 날마다 기쁨이 더해졌으면 좋겠다.
“Enjoy the rest of your day.”
그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다음 화요일을 기다리며 매장을 나서는 발길이 가볍다. 곳곳에 피어있는 수선화의 꽃잎마다 노란 햇살이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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