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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16 02:15
[시애틀 수필-김윤선] 밥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861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달력에 동그라미가 잦다. 세밑 표정이다. 메모 속에서 함께 밥 먹자, 라고 하는 친구들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밥에 따르는 게 수다다.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하는 내겐 수다가 세상과 소통하는 모처럼의 기회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라면 오죽할까

과연 밥은 허기를 채움과 동시에 정신을 목욕시키는 명약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관계가 소원해지면 다른 한 친구가 밥을 미끼로 자리를 만들고 함께 모여서 수다를 떨다 보면 웬만큼 다 화해가 되는 건 밥이 갖는 특별한 힘이다

그 달콤한 유혹 때문인지, 내가 밥 살게, 특별히 축하 받을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제안엔 귀가 솔깃하다.

얼굴 보자, 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역시 밥이다. 얼굴이 상했다거나 얼굴이 훤해졌다거나 호들갑을 떨지만 겉치레인사일 뿐, 정작 그간의 근황에 심도를 더하는 건 밥을 먹으면서다

그래서인지 누구는 밥이 우선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얼굴이 우선이라고 한다. 하긴 얼굴을 봐야 밥을 먹지. 아니다. 밥을 먹어야 얼굴을 보지. 밥 없는 얼굴이 머쓱한 이유다.

‘혼밥’ ‘혼술’ 이라는 신유행어가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어감語感과는 달리 자발적 왕따일 뿐 사회적 왕따는 아니란다. ‘캥거루족’이나 ‘부메랑족’에 비하면 독립적이긴 하지만 두레상에서 밥을 먹고 자랐던 나와는 엄청난 세대차이다

아무리 혼자서 노는데 익숙한 아이들이라도 혼자서 고기 굽고, 혼자서 먹는 상추쌈을 생각하면 괜스레 가슴이 찡하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열 집 중 세 가구가 ‘나 홀로 가구’란다. 쪼개져 사는 대한민국의 가구 수가 이천만이 넘는 다니 식구란 한솥밥을 먹는 가족을 이르는 말이라는 게 무색하다.

입담 없는 경상도 남자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 중 “밥 묵었나?” 는 밥이 곧 가족이라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내심 표현한 말이다. 남편이 선장이었던 친구가 있다. 당시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이 아니어서 통화는 감질나고 음질도 좋지 않았다

짧고 귀한 시간이라 급한 마음에 서로, 밥은 잘 묵고 있소? 만 묻다가 끝나곤 했다며 친구는 눈물을 글썽였다. 어쩌랴, 남편이 그 먼 바다로 나간 이유, 어찌 밥을 묻지 않을 수 있을까. 밥은 생명인 동시에 사랑이다. 이민 초기에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매번, 밥은 잘 챙겨 묵고 있나? 하시던 말씀 또한 북받치는 당신의 사랑을 에둘러댄 게 아니었을까.

따지고 보면 사람 사이의 경쟁도, 나라 간의 전쟁도 궁극적으로는 밥그릇 싸움이 아닌가 싶다. 무역전쟁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밥은 장발장처럼 자신의 배고픔보다 조카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절도를 하게 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전기 밥솥도 없던 시절, 새벽에 과외공부 하러 가는 딸을 위해 부뚜막에서 쪼그리고 앉아 밥 한 그릇을 먼저 하고, 다음에 식구들의 밥시간에 맞춰 또 한 번의 밥을 하신 어머니는 과연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외출에서 돌아오는 내 걸음을 바쁘게 하는 건 멜로디다. 현관문 따는 소리에 녀석이 저 먼저 뛰어나와 꼬리를 흔들어대다가 아예 두 발을 들고 내 눈을 맞추려고 안달이다. 우리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마냥 호들갑을 떤다

그러다가 내 손바닥에 밥알 몇 개를 얹어주면 녀석이 핥는 보드라운 혀의 감촉에 내가 더 행복하다. 나는 녀석의 사랑 일 순위다

그런데 최근에 남편이 녀석의 밥을 새것으로 바꿔서 사왔다. 제 입맛에 딱 맞는 모양이다. 값이 비싸다며 내가 투덜댔더니 그때부터 남편을 기다리는 눈치다. 어쩌나, 녀석에게 일 순위 사랑은 슬그머니 남편이 됐다. 밥이 곧 사랑이다.

지금 밥솥에서 밥을 하고 있는 중이다. 픽픽, 새어 나오는 김을 압력밥솥의 추가 틀어쥐고 있다. 쌀은 제 몸피의 두 배가 넘는 물을 품고, 펄펄 끓는 열기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다. 게다가 땡볕의 에너지까지 나눠주는 귀물貴物이다

물속에서 뿌리를 살려내서 한여름의 땡볕을 견디고 마침내 이삭을 달기까지의 인내, 더구나 그 많은 알곡을 품고도 고개 숙인 자태는 삶의 도를 깨치는데 멀리 갈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나이 들어가며 나름 세상사를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밥그릇의 횟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압력밥솥의 추가 돌연 김을 뽑아낸다. 천장을 뚫을 기세다. 폐쇄된 공간에서 부대낀 갈등이 오죽할까, 가족 간에 겪는 갈등 또한 만만치 않음을 내보이고 있다. 이윽고 김이 가라앉으며 구수한 밥 냄새가 식구들을 부른다

밥솥 뚜껑을 여니 자르르, 찰기가 흐른다. 갈등의 뒤끝이다. 한솥밥이 어느 구석인들 다를까, 위아래를 뒤섞어 한 공기씩 퍼 담는다. 반찬 수가 뭐 대수이랴, 밥은 역시 함께 먹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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