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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5-09 07:27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죽 쑤는 여자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031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죽 쑤는 여자
                                                                                                                                                         
 
큰 딸의 혼례를 앞두고 양가 상견례를 위해 워싱턴DC에 다녀왔다. 무리한 일정 탓이었는지 몸살이 났다. 침대에 몸을 기댄 지 벌써 며칠째다. 누에처럼 이불을 고치 삼아 지내자니 입에 들어온 밥알이 모래알처럼 서걱서걱하다

아무래도 죽을 먹어야 할 성 싶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검은 깨를 갈아 흑임자죽을 한 솥 가득 끓였다. 솥의 바닥이 드러날 무렵, 쌉싸래하면서도 고소한 흑임자의 뒷맛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죽이 혀의 껄끄러움을 다스렸나 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맛이 기운을 불러온 듯하다. 한밤중에 죽 쑤던 모습이 떠올라 미소 짓는 여유마저 생긴다.

얼마 전, 다음날 아침이면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런데 치통으로 고생을 하는 이웃 어른이 계셔서 죽이라도 쑤어다 드리고 가야 마음이 편할 듯싶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다. 냄비에 담긴 잣죽과 흑임자죽, 녹두죽의 색이 곱다. 목이 긴 나무주걱을 양손에 쥐고 세 개의 냄비를 저어대려니 손놀림이 바쁘다. 그야말로 한밤중에 죽 쑤는 바쁜 여자였다.

죽집 아줌마가 된 적도 있다. 한국에 계신 시어머님을 모셔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고형식을 드실 수 없는 환자인지라 부드러운 음식을 드려야 했다. 다행히도 어머님은 죽을 좋아하셨다

평소에 즐겨 드셨던 팥죽으로부터 호박죽, 잣죽, 깨죽, 땅콩죽, 녹두죽, 각종 야채죽 등을 만들어 드렸다. 매일 죽을 쑤다 보니 죽 맛에 길들여졌는지 나도 죽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갈고 닦은 솜씨 덕에 어머님은 내게 ‘죽집 아줌마’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아이들이 팥죽 할미라고 부르는 것을 재미있어 하셨던 어머님은 인생의 끝자락에서나마 며느리가 쑤어 드린 죽을 고맙게도 잘 드셨다. 천국에도 맛난 죽집이 있어서 팥죽 할미 어머님이 마음껏 팥죽을 드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생 잊지 못할 한 그릇의 죽이 있다. 심한 입덧으로 힘겹게 직장을 다니던 때였다. 어느 점심시간 상사의 호출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앞서가던 상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죽 전문점, 당시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손길이 그립던 때에 위로의 말과 함께 놓인 한 그릇의 죽은 따스하고 자상한 보살핌이었다. 된장과 아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아욱죽은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심한 입덧뿐 아니라 힘든 마음까지 부드럽게 감싸주었던 그 죽은 내 안에서 아이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죽은 모든 음식 가운데서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죽이 되기 위해서 곡물들은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으깨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자신을 철저히 포기해야 한다

고열을 견뎌내는 인내가 없이는 부드러운 죽이 될 수 없다.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이 연약한 생명체를 살리는 사랑의 동력이 되듯 한 그릇의 죽 안에는 곡물들의 온전한 희생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것이었을까죽을 먹을 때마다 온몸에 차오르던 평온함과 따스함의 근원이.

그러고 보니 흑임자죽의 검회색은 자식들 때문에 가슴이 숯덩이가 된 어머니의 눈물 빛깔을 닮았다. 이제 알 것 같다. 왜 내가 흑임자죽을 쑤었는지, 한 그릇의 죽 안에 왜 그리도 많은 아픔들이 있었는지.

딸의 결혼을 앞두고 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결에도 엄마 젖가슴을 찾아 더듬는 젖먹이의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것 말이다. 부드러운 죽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갈 때 어머니의 가슴과 딸을 둔 나의 가슴이 맞닿았음이다. 어머니의 가슴이 나를 품고 어머니의 손이 내 등을 토닥거렸기에 내가 이렇게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리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닮는다는데, 내가 죽 같은 사람이 된다면? 죽 같은 사람이라면 매사에 주관이 없어 야무지지 못하고, 일이나 그르치는 한심스러운 인간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심한 몸살을 앓으며 정립한 죽 철학에 따르면, 죽 같은 사람은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아름다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부드러운 모습과 순한 성품으로 누구에겐가 힘이 되고, 아련한 엄마 가슴의 평온함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은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팥죽을 쒀야겠다. ‘죽을 잘 쑤는 여자’가 나의 다른 이름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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